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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각박해지고 국정농단까지 겹치는 바람에 겨울이 와도 크리스마스 기분이 안 나는 건 꽤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이맘때쯤엔 연극이나 뮤지컬을 꼭 한 편 보고 지나가자고 약속했었다. 그래서 올해도 아내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맞춰 창작 뮤지컬을 하나 예매했다. 유정민 작가가 극본을 쓰고 연기도 하는 일인극 뮤지컬 [오늘 하루]다.
유정민의 출연작으로는 [식구를 찾아서]와 [스페셜 딜리버리]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인 것 같다. 유산을 한 번 한 경험이 있는 30대 동화작가가 4년만에 새 아기를 임신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작가가 직접 쓰고 연기를 해서인지 세세한 디테일까지 대사가 아주 수다스러우면서도 오밀조밀하다. 유정민은 주인공인 동화작가 민지원도 되었다가 친구인 자현도 되었다가 남편 태주도 된다. 심지어 둘이 결혼할 때 반대했던 경상도 시어머니와 전라도 친정엄마 역할까지 '변검'처럼 척척 해낸다. 디테일도 훌륭하다. 속이 타는 연기를 할 때는 백산수 한 병을 벌컥벌컥 다 마셔버리고 휴대전화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네 번이나 기종이 바뀐다.
일인극이라고는 하지만 휴대전화 통화, 스크린 이용 등을 통해 여러 배우들을 보고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고 무대 왼쪽엔 일렉과 어쿠스틱을 오가며 연주하는 기타와 키보드, 바이얼린 연주자들, 그리고 극 중간 중간 동화를 낭독하는 여섯 살짜리 꼬마 오유주까지 있어 무대가 꽉 찬다(오유주는 이 연극의 연출가인 오준석 PD와 유정민 배우의 딸이다. 딸이 셋인데 갓난아기까지 둘이 이 연극에 잠깐 출연을 한다).
연기는 물론 노래 솜씨까지 빼어난 유정민의 스토리를 따라 깔깔거리고 웃다보면 어느새 따뜻한 눈물이 흐르게 되는 뮤지컬이다. 유정민은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데 6년 전 첫 딸을 낳고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럴게 재미 있고 진심으로 가득한 연극이 내일까지 단 나흘간만 상연된다는 게 안타깝다. 아마 또 다른 곳에서 또 볼 날이 곧 오겠지, 라고 희망을 걸어본다. 크리스마스가 여름에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오늘 본 [오늘 하루]는 힘겹게 또 한 해를 살아온 우리 부부에게 주는 작은 선물 같은 작품이었다.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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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는 몇 초면 컴퓨터에서 모든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는 이 시대에도 왜 우리가 굳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예술의 진정한 줄거움은 영화를 보는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를 예매할 때의 기대부터 당일 극장으로 가는 길,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 감동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어서 들른 커피숍의 진한 커피향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영화다.
어두컴컴한 극장에 들어거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현실 속의 우리는 사라지고 객석의 모든 남녀는 라이언 고슬링이 되고 엠마 스톤이 된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던 내가 어느덧 노래를 잘 부르게 되고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처럼 춤도 잘 추게 된다. 심지어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고 어쩐지 코도 더 뾰족해진 느낌이 든다. 표정이 풍부해지고 결정적으로 젊어진다. 그렇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두 시간 동안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꿈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아주 로맨틱한 쉼표인 것이다.
꽉막힌 LA 고속도로에서의 첫 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하는 이 영화는 현실과 뮤지컬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번번히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배우 지망생과 재즈 피아노 연주자가 어떻게 만나서 사랑하고 노력하고 성공하고 어른이 되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얼굴을 약간 찌푸려야 더 매력적인 엠마 스톤은 이 영화에서 노래와 춤, 연기 등 모든 분야에서 그야말로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오른다. 그리고 재즈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역의 라이언 고슬링이 연주하는 모든 곡의 멜로디는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라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귓가를 간지럽힌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Stars in the city'를 들으며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의 OST를 사야겠군. 이건 전작 [위플래시]에 이어 또다시 음악을 영화의 중심에 놓은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지난번 작품의 주제가 음악과 음악인 사이의 처절한 사투였다면 이번 영화는 그보다 부드럽고 단순한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맨 처음 만남에서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미아의 차를 채근하며 길게 클랙션을 울려대던 세바스찬은 그 이후 그녀를 만날 때마다 늘 길게 클랙션을 울림으로써 두 사람만의 암호로 삼는다. 함께 주차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눈 앞에 펼쳐진 LA의 야경이 별로라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밤하늘의 낭비인가'라는 노래를 부른다. 야경이 별로라던 두 사람의투덜거림과는 달리 그 순간 이미 둘은 서로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모노 드라마를 준비하는 미아를 위한 '연구 목적으로(for research)' 보게 된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을 계기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그러나 원만한 직선으로만 흘러가는 사랑이나 인생이 어디 있으랴. 두 사람이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갈수록 사이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이고 사랑 영화지만 동시에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컬러부터 앵글, 그리고 배우들의 춤과 노래들에선 이전 헐리우드 영화들에 대한 향수가 물씬 배어난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영화들을 무조건 베끼거나 숭배하진 않는다. 다만 감독은 헐리우드 시스템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때 유행하던 뮤지컬 형식을 가져와 그동안 선배들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행복과 슬픔과 노스텔지어를 심어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계속 춤 추고 노래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마치 그게 인생이라는 듯이.
스포일러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겠다. 다만 이런 진부한 표현을 써서라도 그 느낌만은 좀 남겨두고 싶다. 아마 당신도 마지막 장면에서 라이언 고슬링을 바라보는 엠마 스톤의 그렁그렁한 눈과 미소를 바라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알싸하게 저려오고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질 것이라고. 그리고 이 영화를 보러온 오늘은 참 좋은 날로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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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회사 앞에 산책을 나갔다가 옛날 앙드레김 의상실 옆 주류백화점에서 충동적으로 산토리 위스키를 한 병 샀다. '전품목 세일'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주를 사면서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거실 책장 안에 세워놓고 가끔 꺼내서 폼나게, 오소독스하게 한 잔씩 해야지. 그러나 회사 후배와 맥주를 한 잔 걸치고 집으로 가보니 갑자기 모인 동네 친구들이 좁은 거실에서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고, 다들 내 손에 들린 산토리 위스키를 보고 환호작약 했고, 결국 산토리는 책장에 들어가 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홀라당 다 비워지고 말았다.
두 가지를 깨달은 밤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폼나게 살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술이든 사랑이든 키핑은 어렵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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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 수련 한포기가 살고 있습니다.나는 수련에게 왜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진흙이야말로 존재의 바탕이요 수련의 현실이요 운명입니다.사람들은 제게 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느냐고 묻습니다.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 아닐까요.아비규환의 현실,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과 몸부림의 현실.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찍으려면 몸에 흙이 묻습니다. 집을 고쳐 지으려면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지난 사년간 온몸에 흑을 묻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 시들을 썼습니다.구도의 길과 세속의 길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수행을 통해 가고자 하는 길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2016년 10월도종환
해장국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가 여기 있다밤새도록 벌겋게 달아오르던 목청은 쉬고이기지 못하는 것들을 안고 용쓰던 시간도 가고분노를 대신 감당하느라 지쳐 쓰러진 살들을다독이고 쓰다듬어줄 손길은 멀어진 지 오래어서 오라는 말 안녕히 가라는 말이런 말밖에 하지 않는주방장이면서 주인인 그 남자가 힐끗 내다보고는큰 손으로 나무 식탁에 옮겨다놓은콩나물해장국 뚝배기에 찬 손을 대고 있으면콧잔틍이 시큰해진다어디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랴떨어진 잎들이 정처를 찾지 못해 몰려다니는창밖은 가을도 다 자나가는데사람에게서 위로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받는 날세상에서 받은 쓰라린 것들을 뜨거움으로 가라앉히며매 맞은 듯 얼얼한 몸 깊은 곳으로 내려갈한숟갈의 떨림에 가만히 눈을 감는늦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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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후배인 혜원을 좋아한다. 그런데 혜원은 동욱의 마음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과 사귀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동욱이 조르고 졸라서 겨우 만든 둘만의 술자리이지만 얘기는 겉돌기만 한다. 테이블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새로 옮긴 혜원의 직장 얘기를 하다가 혜원이 육 개월 전부터 동욱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임창수 대리와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옆자리 직장 동료와 몰래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한 동욱은 일방적으로 혜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동욱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이 술집의 주인이자 선배 영식은 혼자 남은 동욱을 위로하고자 중국에서 가져 왔다는 술을 한 잔 따라 준다. 그런데 동욱이 이 술을 한 잔 마시고 고개를 든 순간 영식은 사라지고 눈앞에 사라졌던 혜원이 다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시점은 둘이 새로 옮긴 직장 얘기를 하던 불과 몇 분 전 상황이다. 동욱은 이미 알고 있지만 혜원은 자신이 임창수 대리와 사귄다고 고백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시 얘기를 이어가다가 임창수 대리와 그의 전 애인 은나가 사귄 기간 얘기를 하며 싸우는 두 사람. 이번엔 동욱이 나가고 술집 주인 영식이 중국술을 마시게 된다.그리고 또 타임슬립.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비밀은 술이다. 이 술은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약이었던 것이다.
흔히 단편영화라고 하면 웬지 예술적이라 뭐가 뭔지 모르는 알쏭달쏭한 내용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흥행과는 담을 쌓은 듯 어렵게만 만든 단편영화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일반론을 가볍게 뒤집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정말 좋았건 이유는 타입 슬립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능력으로 지구를 구한다거나 복권을 산다거나 하는 거창한 게 아니라 동생이 훔쳐먹은 푸딩을 다시 차지한다거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첫사랑의 고백을 되돌린다는 사소함에 쓰이는 게 더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도 그렇다. 타임 슬립을 일으키는 중국술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하이컨셉이지만 여기서는 각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도구 이상으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에 연애나 질투 같은 사소한(?) 감정들이 개연성 있는 플롯 속에서 대활약을 한다. 장소 한 번 바꾸지 않은 술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임창수 대리는 얼굴 한 번 나오는 일 없는데도 신기하게도 영화 내내 그 존재감이 느껴지는 건 감독의 뛰아난 각본 감각과 연출력 때문일 것이다.
30분남짓 되는 이 단편은 나와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백영욱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얼마 전 이 작품이 외국의 어떤 영화제에서 뒤늦게 상을 또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림으로써 알게 되었다. 우리 회사의 김건익 실장님에게 영화 [한 잔] 얘기를 했더니 자신은 시사회 때 후배인 백영욱 감독은 물론 그의 가족 친구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고 자랑을 하셨다. 맨 마지막에 혜원이 중국술을 한 잔 마시고 처음의 설전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은 아주 어릴 적 읽었던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라는 동화가 생각나서 더욱 반가웠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이런 멋진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안 그래도 어렴풋이 술 약속을 해놓긴 했는데 11월이 가기 전에 백영욱 감독님하고 만나 이 영화 얘기 하면서 소주 '한 잔'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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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떤 평론가가 작가 이병주를 평하면서 그가 일제시대와 815해방, 625사변, 419혁명, 516쿠데타 등등 파란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세대라 그만큼 할 이야기도 많은 작가라고 쓴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작가에게 할 얘기가 많다는 것은 일단 축복일 것이나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몸에 저장하기 위해 그가 살아내야 했던 힘겹고 유난한 세월 또한 그에겐 축복이었을까.
“서울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하얗디야. 우리 언니가 서울 갔다 왔는디 거기 사람들은 수돗물을 먹어서 얼굴이 다 그렇게 하얀 거랴.”지난봄, 숙자가 자랑처럼 한 말이었다. 숙자의 언니가 방직 공장에 취직하러 서울에 다녀 온 직후였다.일본은 서울보다 수돗물이 더 잘 나오는지, 그들은 유난히 희었다. 몸 전체에 석회라도 발라 놓은 것 같았다. 미희는 밑단에 흰 수술이 달린 큰 꽃무늬 반팔 상의와 곧은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신고 있는 흰 에나멜 구두가 내리꽂히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모든 훌륭한 소설이 그러하듯이 [유령의 시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마침내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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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재법 선이 굵은 사회파 드라마를 연출했으나 요즘은 '살짝 막장성 드라마'로 외도를 함으로써 시청률의 달콤함을 맛본 모 PD에게 동료 PD가 장래가 촉망되는 어린 작가를 하나 소개해 줬다.
"야, 얘가 아주 골때려요. 제2의 임성한이라는 소릴 듣는다는 앤데, 사고가 아주 자유롭고 튀어."
호기심이 생긴 모 PD는 다음날 그녀를 방송국으로 불렀다.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자신이 요즘 구상하고 있다는 작품에 대해 피처링을 시작하는 그녀.
"일단,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해요. 그런데 대통령직을 시작하는 수락 연설문부터 그녀 대신 읽고 고쳐주는 여자가 있어요. 최 마담이라고. 그녀는 대통령이 어렸을 때부터 따르던 어떤 사이비 교주의 다섯번째 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의 인연으로 그녀는 대통령이 읽는 모든 연설문의 초고를 첨삭지도해요. 아, 인사에도 개입해요. 장관도 추천하고 고위 공직자도 자르고 그래요. 그리고 대통령 옷이나 핸드백도 죄다 이 여자가 챙겨줘요..."
잠깐, 그럼 대통령은 뭘 하지? 모 PD가 중간을 자르고 물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대통령은 그녀가 시키는대로 읽고 말하고 입고 오가며 대통령 코스프레를 하게 돼요. 그녀 역할이 좀 비는 거 같아서 제가 '유체이탈화법'을 하나 고안했어요. 자기 책임이 불거질 일이 생길 때마다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 화법이에요. 그녀는 스스로는 얘길 잘 안 해요. 어쩌다 최 마담이 바빠서 첨삭지도를 놓치는 날엔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신만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같은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튀어나와요. 이렇게 대본을 쓰면 욕을 먹겠지만 상관 없어요. 사람들은 욕하면서도 계속 이 드라마를 볼 테니까요. 그리고 아주 가끔씩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같은 코엘류 식의 잠언을 하나씩 심어요. 여당은 살아남기 위해 이 사실들을 다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죠. 야당은...에, 야당은 그냥 병신들이라 몰랐다고 할까요? 좀 리얼리티가 떨어지긴 하지만 뭐 꼭 틀린 말도 아닌 거 같고.
최 마담이 재단을 설립하면 하루만에 허가가 나와요. 자주 다니던 마사지센터 사장을 바지사장으로 앉혀도 다 돼요. 재벌들이 수백 억씩 거둬주니까. 아, 그리고 막판엔 CF감독도 하나 등장해요. 그 사람을 거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 문화판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데 그를 최 마담한테 소개한 남자는 전직 호빠 마담쯤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황당할수록 재밌잖아요. 이왕 지르는 거 막 쓰죠 뭐. 최 마담의 딸은 말을 타는데 얘가 말 타면서 여러 사람의 목을 베요. 스물 살에 애도 하나 낳구요. 애 아빠는 아직 어리니까 그냥 '전직 삐끼' 정도로 처리할까요?
그러다가 최 마담이 도망가면서 컴퓨터를 건물 관리인한테 맡겨요. 그런데 어떤 기자가 그걸 우연히 손에 넣고 보니 거기 그동안의 대통령 연설문이나 외교문서가 고스란히 다 들어있는 거죠. 말하자면 최 마담의 집이 사실상의 청와대 집무실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거죠. 바로 전날 대통령은 개헌을 하자고 쉴드를 쳐놓은 상태인데...
눈이 동그래져서 그녀의 얘기를 듣던 모 PD는 손을 번쩍 들어 그녀를 멈추게 하고는 급히라 부하직원을 불렀다.
"야, 이년 당장 치워라. 어따대고 이런 개막장을...도대체 지금 니가 씨부린 것들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이 미친년아?"
그 후로 장래가 촉망되던 그 어린 작가는 모 PD가 하도 여기저기 치를 떨며 악소문을 내는 바람에 아주 연예계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제2의 임성한'이 될 아까운 재목 하나를 놓치게 되었다는 아주 슬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