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꿈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대통령'이라고 대답하고 정말 싱겁게 대통령까지 궤도수정을 한 번도 안 하고 달린 사람은 김영삼 하나로 충분하다. 다들 어렸을 적엔 얼토당토한 꿈을 꾸기 마련이지만 철이 들면서 자신의 능력이나 집안 사정, 사회적인 분위기 등등에 따라 순차적으로 그 꿈을 수정하기 마련이고 그게 세상 살아가는 이치다. 그런데 여기 사뭇 다른 이유로 어린 아이들이 눈물을 머금고 꿈을 바꿔야 하는 직종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바로 언론인이다. 기자나 앵커 등 정상적인 언론인을 꿈꾸는 건 자유지만 유독 대한민국에서는 그 직종의 노후 전망을 어둡게 하는 부정적 요소가 또아리를 틀게 된 것인데 이름하여 김영란법이다.

도대체 김영란은 누구더냐. 그는 여성이며 전 대법관 출신의  수퍼 엘리트'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대법관을 지낸 변호사는 3년 안에 100억을 버는 법조재벌이 되는데"(박찬종 변호사의 칼럼) 굳이 그걸 포기하고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공직자들에게 뇌물을 받아먹지 말라 미친듯이 외치고 있으니 동업자들 사이에서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놓은 잔칫상을 같이 엎어버리자는 ‘상 또라이'인 것이다. 법조계를 출입하던 뜻있는 기자들도 입을 모아 이건 아니라고 분연히 들고 일어났으나 아뿔싸, 계속되는 폭염에 잠깐 더위라도 먹은 건지 믿었던 헌재마저도 며칠 전 합헌 결정을 내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발의되었던 이 법이 언론계로 불똥이 튀면서 기자 사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28일 한국기자협회는 대한변호사협회 등과 함께 제기한 ‘김영란법’ 헌법소원심판 합헌 결정에 대해 ‘비판언론 재갈물리기 악용 안 된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무엇보다도 권력이 김영란법을 빌미로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릴 가능성을 경계한다”고 밝혔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고위층이 힘 대신 ‘신고나 고발조치'를 통해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릴 것이라는 기발한 착상이다.


그들은 말한다. "엄연히 민간영역에 속하는 언론이 공공성이 크다는 이유로 ‘공공기관’, ‘공직자’로 규정되고 언론활동 전반이 부정청탁 근절을 위한 감시와 규제 대상이 되는 상황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보라. 언론고시를 통해 사회에 나왔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졸지에 공직자 신분으로 바뀌게 된다니 열 받을 만하지 않는가. 더구나 감시자에서 감시를 당하는 사람으로 입장이 뒤바뀐 기자들로서는 당연한 권리 주장인 것이다. 


큰일이다. 원래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인 김영란법이 우리 기자들의 취재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고 말았으니. 당장 기자들은 이제 어디 가서 점심을 먹으며 친한 소식통들과 얘기를 나눌 것인가. 더구나 '어디 가면 무슨무슨 식당이 맛있고 거긴 좀 비싸지만 어차피 우리가 돈 내는 거 아니니까 걱정할 것 없이 골고루 시켜 천천히 맛을 음미하라’는 식으로 후배들에게 전수하던 취재요령조차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2016년 7월 29일 jtbc ‘뉴스현장’에 출연해 “기자가 취재원 등 업무관련자와 식사할 때 접대비용 3만 원의 상한선을 두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이라며 “정치인과 언론인, 정치인과 민원인 등 이해관계인들이 방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해야 할 얘기가 있는데 3만 원으로 식사하려면 별도 방에선 거의 불가능하고 다중이 쳐다보는 홀에서 먹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5만 원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논설위원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구체적인 설명이라 좀 쪼잔한 감이 없지 않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다. 도대체 일반 홀에 앉아 사람들이 쳐다보는 상황에서 고위 공직자나 기업 입원들일 게 뻔한 취재원들이  어찌 기자들과 서로 깊은 속내를 털어놓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들에겐 ‘파티션(칸막이)’은 기본이다. 예쁜 여종업원들이 서빙을 하느라 바쁘게 왔다갔다 하면 점잖게 불러서 만 원짜리 두세 장을 손에 꼭 쥐어주고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쉴드를 쳐야 대화 분위기가 잡히는 법이다. 이런 걸 그들은 하나도 모른단 말인가. 

농민들도 걱정이다. 그동안 5만 원 넘는 뇌물용 농산물을 양산해 옴으로써 생계를 유지해 온 대한민국의 특산물 농가들은 이제 누굴 믿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한미FTA로 망해, 김영란법으로 망해, 정말 살 수가 없다. 김진 위원은 3만 원 이상 식사를 해도 ‘더치페이’하면 되지 않느냐는 앵커의 물음에 “만약 우리나라에서 전부 다 영수증 처리한다면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다 적어내야 할 것 아니냐”며 “5만 원 정도에서 공무원들의 자유재량을 확보해 줘야 세상일이 돌아간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모두가 훤히 볼 수 있는 홀 테이블에 앉아 전에부터 잘 알던 고위공직자와 만나 형님, 잘 지내셨어요? 응, 니 덕분에 변비가 좀 나았어. 같은 알맹이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김진 논설위원을 상상하고 있자니 가슴이 아파 온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14년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는 OECD 34개 회원국 중 27위를 차지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아직 더 부패할 여유가 남아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취임 당시 언급했던 지하 경제 측면에서 보더라도 언론계의 공짜 점심은 그 방면의 금맥이다. 철모르는 대법관 출신의 망발로 인해 대한민국의 언론계가 위축되고 한 해 10조 원이 넘는다는 재계의 접대비 문화가 사라지는 꼴을 더 이상은 볼 수 없다. 나 혼자라도 김영란법 퇴치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순간이다. 

정부는 연 10조 원 규모의 접대문화를 훼손하는 김영란법을 당장 폐지하라!! 
정재계는 기자들의 복지를 위협하는 '반김영란법 펀드'를 당장 조성하라!!
김영란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당장 변호사를 개업해서 전관예우를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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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작가가 꿈이었다. 어머니는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았다. 간호대학에 들어간 후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국문과 친구들의 강의를 대신 듣기도 하고, 과제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그러다 최초로 나를 눈여겨봐준 선생님을 만났다. 원래는 전남대 교수님이었는데 5.18 때 해직을 당하는 바람에 우리 학교에 출강하게 됐고, 두 학기 동안 '교양 국어'를 가르치셨다. 아마 중간고사 때였을 것이다. 우리는 시험지 대신 백지를 받았고, 멍한 심정으로 교수님이 칠판에 '얼굴'이라고 쓰는 걸 쳐다봤다. 그게 시험문제였다. 글을 쓰든지, 그림을 그리든지, 너희들 맘대로 해보라. 50분 만에 백지 앞뒷면을 빽백하게 채웠다. 일주일 후, 교수님이 부르더니 대뜸 '습작노트 가져와봐' 하셨다. 그런 게 있는지 여부도 묻지 않는 걸 보면, 있다고 짐작하신 것 같다. 짐작대로, 그간 친구들을 대신해 쓴 과제물이며, 독후감, 산문 같은 걸 써둔 노트가 있어 가져다드렸다. 부끄럽긴 했지만, 내 글을 평가받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났을 때, 교수님이 다짜고짜 물었다. 국문과롤 전과할 마음이 없느냐. 어머니가 반대한다고 말씀드리다가 하마터면 울 뻔했다. 생긴 건 이래도 눈물이 꽤 많은 편이라...
그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나긴 세월 동안 나 자신을 믿는 근거가 되었다. 문장을 잘 쓰는 학생들은 수없이 봤지만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아이는 처음 봤다고 했다. 포기하지 말고 아주 잠시만 꿈을 접어두라고 하셨다. 나중에 작가가 되면 나를 한 번 찾아오라고도...내가 작가가 되었을 땐 이미 작고하셨다. 

- Axt 2007년 8월호 인터뷰 중에서 


* 오늘 정유정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눈물이 찔끔했다.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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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원더플 라이프>였다. 상영관이 광화문 씨네큐브였는데 예매를 해놓고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간에 쫓겨 마구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헐떡이는 숨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지켜본 그 영화는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열흘 정도 림프계에 머물면서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무엇인지 반추해 보고 그걸 토대로 자기만의 단편 영화를 하나씩 찍는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일생을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으로 '도쿄 디즈니랜드에 갔던 때'를 꼽은 경우가 많았다는 기사에 충격을 먹어 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는 후일담을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아내는 원작소설을 읽은 것 같다고 한다)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죽음이든 죽음에 대한 생각이든 이 감독은 전혀 슬프지 않게 일상처럼 차분하게 다룬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 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팬이 되었고 그 후로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등을 차례차례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개봉한 그의 데뷔작 <환상의 빛>을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어제 보게 된 것이다. 영화는 아무런 이유 없이 3개월된 어린 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스물여섯 살에 자살하듯 기차에 치여 죽은 남자 얘기로 시작된다. 망연자실한 아내. 그러다가 몇 년 후 아랫집 세탁소 아주머니의 소개로 멀리 바닷가 마을로 재혼을 하러 간다. 상대는 딸이 하나 있고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남자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아이들도 여자를 잘 따르고 남자도 서글서글하니 잘 대해준다. 처음 남편이 죽었을 때는 도저히 못 살 거 같았는데 또 어찌어찌 다른 곳에서 정을 붙이고 살게 된다. 



여자는 전남편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는지 늘 궁금해 하지만 인생엔 끝내 답을 찾을 수 없는 게 너무나 많다. 여자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전남편의 죽음에 대해 현재 남편에게 물어본다. 그런데 남편은 담담하게도 자기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여자는 어쩌면 지금 남편이 시아버지에게 들었다는(마치 사이렌의 노래를 닮은) 수평선 위 반짝반짝 빛나는 '환상의 빛' 때문에 그 남자가 그렇게 된 건 아닐까 그냥 짐작해 볼 뿐이다. 분명한 건 누군가의 죽음 뒤에도 다른 사람들의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걸 서두르거나 채촉하는 일 없이 카메라를 통해 천천히 바라볼 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씨네21의 20자평을 찾아보니 그냥 다짜고짜 '환상의 힘'이라고만 쓴 평론가도 있고(진짜 이 영화를 본 건지 의심이 간다) '동전의 양면 같은 생사불이, 거기 아롱대는 빛의 매혹!"이라고 과대하게 의미부여를 한 사람도 있었다. '남겨진 사람의 통증. 답을 찾으려, 빛을 찾으려'라는 휘트먼의 싯구절 같은 평마저 있다. 내 생각엔 영화에 죽음이 나온다고 해서 그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들엔 죽음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그 자체의 비장함보다 죽음 이후에도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따뜻하고 차분한 시각으로 관조하는 데 쓰임으로써 더 큰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악인이나 극적인 사건, 또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아도 그의 영화는 언제나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이 영화는 만든 지 21년이나 된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내는 "저 어린 여배우도 이젠 나이가 많이 들었겠네..." 라고 혼잣말을 했다.  1995년 베니스 영화제 촬영상(황금오셀리오니 상), 카톨릭 협회상, 이탈리아 영화산업협의회 상을 수상하고,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것도 모자라,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게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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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정책기획관의 "국민의 99%는 개나 돼지와 같다”라는 발언 덕분에 인간의 가치가 그리 높게 느껴지지 않을 때 마침 <곰의 아내>라는 연극을 보았다. 왜 '곰의 아내'냐 하면 주인공인 소녀가 어느날 산에서 발을 다쳐 길을 잃었다가 곰을 만나 그의 새끼까지 낳고 살게 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살을 하려던 한 남자를 구해주게 되는데 그에게 자신이 곰의 아내였으며 자신의 새끼를 사냥꾼이 죽여버린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 곰 대신 그 남자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새롭게 아이를 낳고 살게 된다. 다분히 신화적인 이야기이다. 일단 곰이 나오니 우리의 단군신화나 웅녀 생각부터 떠오른다. 


남산예술센터는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이어 두 번째로 온 곳인데 원형강의실처럼 구성되어 있어 무대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최소한의 효과만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심플한 시스템이라 올때마다 기분 좋은 극장이었다. 객석도 입식좌석을 고정시켜 놓은 형태라 공간 낭비가 적고 편안하다. 물론 내가 연극 공연 도중 무심코 발을 좀 길게 뻗었다가 앞에 앉은 여자 관객의 옆구리를 건드리는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말이다. 


영화 <화장>과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열연했던 배우 김호정의 호연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다만 팜플릿의 인삿말에서부터 작가와 연출의 변이 서로 부딪히는 것을 읽게 된다는 건 안쓰러운 일이었다.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수많은 곰아내들이 있습니다"라고 쓰며 이는 곧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동굴 속으로 들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자신도 수 많은 곰아내 중의 하나였다가 연극을 하고 글을 쓰며 무사히 걸어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래 쓴 희곡 <처의 감각>이 아니라 각색된 대본 <곰의 아내>로 공연을 하게 된 점이 대해 송구한 마음이라고 썼다.


작가가 '곰의 아내'라는 것을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읽은 것에 비해  연출가 고선웅은 함께 살기 시작한 남자가 생활의 짓눌려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고 여자도 결국 이전에 같이 살던 곰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에 촛점을 맞춘듯 하다. 이는 세계관에 대한 충돌이다. 작가는 신화적 해석을 하는 반면 연출가는 이 모든 과정을 '샐러리맨의 딜레마' 정도의 메타포로 좁히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극은 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하고 공허하게 흘러간다. 작가의 의도대로 공연이 되었으면 훨씬 더 단단한 장면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내도 <처의 감각>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한 번 이 연극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나 연출 둘 다 쟁쟁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래서 어느 사람이 옳다고 말할 순  없다. 더구나 예술은 '타협'의 세계가 아니다. 다만 극단 '마방진'의 특징이라고 하는 과장된 톤과 문어체 형식의 대사를 조금 더 살려서 가슴 뜨거운 장면들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마지막에 진짜 곰이 잠깐 출현하는 키치함 대신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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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부터 허리가 아파서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난리를 치다가 퇴근시간에 교보문고에 목보호대를 사러 간김에 참지 못하고 책을 또 한 권 샀다. 곽재식의 작품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다. 곽재식은 옴니버스 소설집에 실렸던 단편 <박시은 특급>을 읽고 홀딱 반했던  소설가다. 버스 안에서 읽은 그의 데뷔작 <달과 육백만 달러>도 재미있는데 그 다음에 실린 <최악의 레이싱>은 심하게 웃기고 착하고 재미있다. 마치 배명훈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다. 아껴놨다가 내일부터 한 편씩 천천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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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내면 진다, 가뷔 바위 보! 안 내면 진다, 가뷔 바위 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며 한 명씩 피구 경기의 팀원을 뽑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소리만 들리고 카메라는 한 소녀의 얼굴을 고정적으로 비추고 있다. 혹시 자신이 최후까지 남을까봐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소녀. 그러나 결국 염려대로 자기가 맨 마지막까지 선택되지 못했다. 맨 마지막에 잉여 인력인 소녀를 억지로 데려가야 하는 팀의 친구가 뭐라뭐라 이 여자애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다가 맨 마지막에 "미안, 농담인 거 알지?" 하고는 게임을 하러 가버린다. 짧지만 슬픈 장면이다. 



 토요일 아침에 잔인하고 무서운 심리극을 보았다. CGV압구정에서 상영 중인 영화 [우리들]. 이건 11살 어린 아이들의 우정, 이 아닌 갈등을 다룬 영화다. 다시 말해 어린들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어린이 영화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뭐 그리 큰 갈등이나 고민이 있겠어,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삶의 갈등과 오해, 염려, 수직과 수평을 오가는 권력관계 등은 어린이들이라고 어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게 편치 않은 건 그게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라 더 답답하고 끔찍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팽팽하고 자연스러운 극의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윤가은 감독의 뛰어난 연출 덕분이다. 자신의 경험담에서 시작되었다는 영화의 주제는 아역 배우들에게 연기학원을 그만두게 한 뒤 일대일 개별 면담시간을 거쳐 배우들의 개성을 파악했고, 전체 내용은 모르더라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상황들은 정확하게 인식하게 한 다음에 자신의 표정과 대사로 펼치게 한 즉흥연기를 카메라 두 대로 찍어냄으로써 훌륭한 리얼리즘으로 형상화되었다. 이 영화의 출현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비교하는 영화의 카피는 이전에 이 작품과 거의 비슷한 연출 방법을 먼저 선보였던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출 방법이 비슷하다고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이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기에 사용된 것이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들이 떠올랐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갈등들, 가슴을 후벼파는 대사들, 원형적인 인물들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모양이다. 뛰어난 어린이들의 연기는 물론 영화에 배치된 어른들의 캐릭터나 배경도 영화의 질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맨 마지막에 아주 희미한 화해의 가능성만 남겨두고 두 인물에 집중하는 카메라 워크는 이 영화를 끝까지 빛나게 한다. 특히 무심하게 들려오는 피구 경기의 앰비언스는 대학교 개방형 강의실을 물끄러미 비춰주던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마지막 씬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가 해외에서 상을 많이 타서 감독이 다음 작품을 좀 더 수월하게 연출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 토요일에 영화를 보고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급하게 쓴 감상문인데 기록의 차원에서 제 홈피에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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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하늘색 웃도리를 입은 서현진이 식탁에 앉아 입이 미어터지도록 밥을 밀어넣으면 그 위로 '엄마의 마음이 놓이는 장면'이라는 자막이 뜬다. 옆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맛있니?" 계속 숟가락에 묻은 밥알을 핧아 먹으며 "어...!"라고 대답하는 서현진. 카메라가 밑으로 내려가면 그녀가 먹는 밥의 정체가 보인다. 햇반이다. 그것도 미처 밥공기에 덜지 못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것 그대로 퍼먹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얘 엄마는 뭐하느라 굶고 들어온 딸년 밥 한 공기 못 해먹이고 햇반 뜯어먹는 걸 옆에서 쳐다보며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는 걸까. 


나도 광고를 만드는 사람인데 남이 만들어놓은 광고를 헐뜯으려고 이런 글을 쓸 리가 없다. 더구나 이 광고는 아주 잘 만들어진 광고다. '마음이 놓이다, 햇반이 놓아다'라는 카피도 질투날 정도로 좋고 바스트샷 카메라를 압도하는 요즘 '대세' 서현진의 찰진 연기도 만점이다. 다만 그녀가 먹고 있는 밥이 문제다 햇반은 밥이 아니다. 카피처럼 '갓 짓은 밥맛'이긴 하지만 이건 알고보면 가짜다. 심지어 밥알도 진짜 밥알이 아니고 지어진 밥을 으깨어 다시 밥알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밥이 중요하다는 얘기고, 마침 고은정의 <반찬이 필요 없는 밥 한 그릇>이라는 책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므로 그 책의 유용함에 대해 소개하려는 것이다.


고은정은 약선 식생활연구센터 소장 겸 우리장 아카데미 대표다. 지리산 뱀사골 근처 '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를 운영하기도 하는 음식문화 운동가다. 한 마디로 요리 연구가가 아니라 음식 연구가인 것이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보다는 우리 몸에 좋은 음식 얘기를 많이 하고 음식 밑에 깔려 있는 인문학적 통찰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맛이 없어도 몸에 좋으니 참고 먹으라는 막무가내식도 아니고 우리 음식이 무조건 좋다는 식의 국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밥'에 대한 책을 냈다. 냄비나 압력밥솥 또는 전기밥솥에 쌀 씻어서 안치면 저절로 되는 게 밥인데 뭘 새삼스럽게 책을 다 냈을까. 


밥은 쌀과 물과 불이 만들어내는 삼중주의 예술품이다. 하지만 재료가 너무 단순한 탓인지 오히려 맛있는 밥맛을 구현해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재료뿐만 아니라 조리법조차 단순하여 밥맛 내기의 어려움에 한몫 거든다.


 위의 글처럼 이 책은 재료 뿐 아니라 조리법초차 간단하여 밥맛 내기에 어려움이 있음을 바탕에 갈고 들어간다. 그러면서 제대로 '요리'된 밥 한 끼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고 풍요하게 하는지를 역설한다.  


우리의 밥도 다양한 재료와 결합하면 더 맛있어진다. 철마다 나오는 싱싱한 채소나 감칠맛 고는 해물들을 쌀과 같이 넣고 밥을 해 먹거나 조금 더 기분을 내고 싶은 날엔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를 넣고 같이 밥을 해 먹으면 밥도 요리가 된다. 흰쌀밥을 할 때 갖게 되는 반찬의 부담감을 밥 하나로 다 날릴 수 있으니 자꾸 밥을 해 먹고 싶어진다. 밥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맛있는 밥을 집에서 해먹는 것. 거기엔 밖에서 아무리 비싼 요리를 사먹더라도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기쁨과 충만함이 있다. 그리고 보온밥통에서 꺼내먹는 이름만 '더운밥'인 보온밥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이 있다. 


바쁜 현대인들이 매끼 새로 밥을 해서 먹을 수 없게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전기를 이용해 보온을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밥 짓는 수고를 힘들어하고 밥을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보온의 기능이 담긴 밥솥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놀람과 기쁨을 잊지 못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였다. 수고를 덜고 시간을 벌었지만 밥맛을 놓쳤기 때문이다.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한 이 대사 한 마디가 이렇게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될지는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생래적으로 느끼는 삶의 본질을 건드린 대사라서 그렇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만큼 우리에겐 한 끼니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당장 김한길의 에세이 [아침은 얻어먹고 사십니까]나 김훈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들춰보시라. 이 책들은 제목에서부터 우리의 삶이란 밥에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도 처음 자취생활을 시작할 때 밥하는 법이 적혀있는 요리책을 산 기억이 있다. 요즘 영화 <곡성> 때문에 뭣이 중한디? 라는 말이 유행이다. 나는 정말 중요한 건 밥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제목이 '반찬이 필요없는 밥 한 그릇'이다. 그렇다고 맨밥을 먹으라는 게 아니다. 쌀을 잘 고르고 재료의 성질을 잘 이해하면 누구나 가장 소박하면서도 알찬 한 끼를 영위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책값이 만 원이다. 내가 가끔 가는 을지병원 뒤 평양면옥의 냉면 한 그릇 값인 만천 원보다 싸다. 지금 친구에게 냉면 한 그릇을 사주면 하루 고맙다는 소릴 듣겠지만 오늘 그 친구에게 이 책을 한 권 선물한다면 그는 아마 몇 년 동안 당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너무나 간단하고도 중요한 행복의 방법을 선물해 주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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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100100&artid=201606232116005



며칠 전 신문에서 문정희 시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 시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러다 오늘 우연히 좋아하던 시 '남편'을 다시 찾아 읽게 되었구요. (구글에 '문정희 남편' 이렇게 쳤더니 탤런트 겸 배우 문정희의 남편 스펙이 좌르르 뜨더군요)


저는 이 시를 참 좋아하는데, 특히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먼 남자'라는 구절이 정말 좋습니다. 귀여운면서도 넉넉한 시인의 풍모와 유머감각이 그대로 드러나죠. 


오늘 저녁엔 텅빈 회사 사무실에서 이 시 한 편 읽고 혼자 빙긋 웃었습니다. 좋아서요.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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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에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옛 단편이 읽고 싶어져서 책꽂이에서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을 꺼내들었다. 김춘미 교수가 번역한 책으로, 내가 맨 처음 하루키를 접한 책이다. 맨 앞에 있는 <중국행 슬로보트>를 펼치면서 이전에 이 단편의 인상이 상당히 모호했던 게 기억났다.


그러다가 유유정 교수가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선]에도 이 작품이 실려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거기 실린 작품의 제목은 <중국행 화물선>이었다. 제목은 좀 다르지만 똑같은 작품이겠지, 하면서도 번역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싶어서 두 작품을 대조해가며 읽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 두 작품이 같은 원작을 보고 번역한 작품이 맞단 말인가. 번역은 유유정의 버전이 좀 더 촘촘하다. 그런데 주인공이 초등학교 때 중국인 학교 교실에 시험을 치르러 가서 생애 최초로 중국인을 만난 경험 뒤로 이어지는 고3때의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장면이 몽창 빠져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두 번째로 만난 알바 동료 중국인 여학생과 디스코테크로 놀러갔던 얘기는 김춘미 교수 버전은 거의 '다이제스트'처럼 세부 묘사들이 뭉텅뭉텅 빠져 있다. 중요한 장면이고 필요한 심리 묘사인데도 그렇다. 그렇다고 유유정의 번역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다.


외국어가 익숙치 않아 번역본을 읽어야만 하는 처지가 바로 이런 것인가. 아니면 두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발표한 글의 다른 버전을 차례대로 번역한 것일까. 하나는 1991년, 또 하나는 1992년 초판 번역이다.


내가 그동안 읽은 책들은 작가들의 의도나 문장과 몇 퍼센트나 만난 것일까. 이젠 정말 번역된 책을 읽는 것이 두려워질 지경이다. 그나저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아니, 문학사상사나 모음사는 예전에 이걸 알기나 했을까. 몰랐다면 직무유기요 알고도 이랬다면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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