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뛰어나야 연기도 잘 한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 – [더 테러 라이브]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정말 신기했던 것은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팔려가던 민초들을 다루거나 순진한 마음으로 정신대에 자원하다시피 끌려가는 소녀들을 다룰 때는 독자들을 같은 편에 서서 울분에 떨게 만들던 작가가 친일파들을 묘사할 때는 180도 돌변해서 어찌 그리 얄미우면서도 논리정연하게 남의 속을 긁는지.. 정말 대단합니다. 혹시 작가가 친일파 출신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죠. 



오늘 [더 테러 라이브]에서 하정우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정우가 맡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윤영화 앵커는 영화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정말 정이 안 가는 밥맛이죠. 아홉시뉴스 앵커를 5년 간 하다가 뇌물수수 비리로 인해 며칠 전 라디오로 쫓겨온 인물이며 방송기자인 아내의 아이템을 훔친 일 때문에 별거까지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테러범의 전화를 받은 뒤 경찰에 신고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이걸 가로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드는 야비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정우가 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혹시 저 자식이 실제로 저런 야비한 놈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인물에 몰입을 하게 만듭니다. 처음에 후줄근한 차림새와 잠 덜 깬 얼굴로 방송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순식간에 야욕이 넘치는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은 참 대단합니다. 더구나 하정우는 이 영화에서 야비한 면뿐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따라 때론 아주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시점부터는 자신이 속한 시스템에 진한 회의를 느끼는 역할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게다가 흔들리는 카메라는 잠시도 하정우라는 배우를 떠나지 않죠. 



이창동 감독은 어리버리한 [오아시스]의 설경구 캐릭터를 설명하며 “그게 다 내 안에 들어있던 모습”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엔 참으로 많은 캐릭터들이 숨어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많은 캐릭터들 중에 한 가지만 꺼내서 살게 되죠. 두 가지가 번갈아 나오면 그게 ‘지킬과 하이드’가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뛰어난 작가나 배우들은 수시로 여러 캐릭터들을 꺼내 독자나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김수현의 드라마를 봐도 그렇습니다.그녀의 드라마에서는 도저히 한 사람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의 개연성을 가지고 빼곡하게 등장하죠. 


전 이게 상상력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상력은 작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흔히들 배우는 상상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전 배우야말로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연기도 잘 합니다. 머리가 나쁘면 연기도 못해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캐릭터를 꺼낼 수 있는 힘, 이건 훈련만으로 되는 건 아니거든요. 타고난 상상력과 노력이 합쳐져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한때 ‘설리가 진리’라는 말이 있었듯 요즘 몇 년간은 ‘하정우가 대세’입니다. [더 테러 라이브]를 보시면 왜 지금 하정우가 대세 소릴 듣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근데, 저 자식도 실제 저렇게 야비한 인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이경영의 날렵한 연기를 보는 즐거움은 ‘덤’이구요.  







Posted by 망망디
,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는 악당들의 인질극 덕분에 주인공 이소룡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한민국에 있는(!) 파고다탑에 가서 보물을 탈취해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탑엔 각 층마다 세계의 무술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 거죠. 이소룡은 첫 칸부터 압둘 자바가 기다리고 있는 맨 윗층까지 올라가 차례차례 고수들을 제압해 나갑니다. 전 그 영화를 볼 때 어린 마음에도 “쟤네들은 도대체 이소룡이 오기 전까지는 저기서 뭘 하고 기다릴까? 먹을 것도 놀 것도 없는 텅 빈 방에서…그리고 왜 이소룡이 괴조음을 내지르고 싸울 때 밑으로 내려와 동료 고수들과 같이 싸우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등장인물들에 대한 ‘개연성’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보면서도 비슷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설국열차라는 설정 자체가 ‘노아의 방주’ 같은 세기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짐작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꼬릿칸의 사람들은 저토록 현실적이고 삶에 대해 확고한 신념과 욕구, 기대치가 있는데 반해 다른 칸 사람들은 왜 저렇게 비현실적이며 도대체 ‘인격체’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하고 의아했습니다. 물론 꼬릿칸 사람들이 최하층민 계층이니까 반란의 욕구가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배층에 속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동조하는 계층이라서 그렇다고 할 순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란군들이 달려오는데도 자신의 열차칸을 벗어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비로소 총을 쏘거나 도끼질을 한다는 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가하게 앉아 초밥을 만들어 먹거나 어린이들과 수업을 하거나 계속 마약을 하고 춤을 추고 사우나를 한다는 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한마디로 불편한 거죠. 그런데 제 아내는 이 장면이 너무도 당연하고 잘 된 설정으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저와 삐딱선을 탄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여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봉준호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것도 관람의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습니다. 열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서로 망치 살육전을 벌이던 적들끼리 “해피 뉴 이어!”를 외치며 잠깐 멈추는 유머코드는 [올드보이]에서 자기 생니를 뽑으며 고문하던 악당에게 “우린 친구잖아”라고 말하는 오달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박찬욱은 이런 잰체하는 유머코드를 좋아합니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틸다 스윈튼의 연기도 거북했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결정적으로 삶은 계란을 나눠주다가 그 트레이 속에서 기관총을 꺼내 쏘는 장면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명백한 오마주라고 해야겠죠.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시퀸스에 이르기까지 ‘팔’에 대한 고찰이 많이 나옵니다. 앤드류의팔은 열차 밖으로 내밀어졌다가 박살이 나고 꼬리칸의 선지자 길리엄은 팔이 없는 반면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커티스는 아직도 자기가 팔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이 모든 게 나중에 ‘달마대사’의 메타포임이 밝혀집니다. 전 이게 좀 싱겁습니다. 


그리고 열차의 엔진을 소유하고 있는 맨 앞칸의 윌포드가 작은 아이를 납치해 가는 이유도 “이 작은 곡사포 안을 어린아이 손 아니면 어떻게 닦아낸다 말입니까?”라는 거짓말로 나치들로부터 어린 생명을 구했던 쉰들러의 대사를 거꾸로 변용한 것 같아서 좀 낯간지러웠습니다. 



얘길 하다 보니 온갖 불만을 늘어놓으며 남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폄훼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군요. 그런데 평소에 안 그러던 정말 제가 정말 왜 이럴까 생각해 봤더니 가장 결정적인 건 ‘감동’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짜릿함이나 감동 부분의 트리거 역할을 해야 할 요나와 남궁민수의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 연기 잘 하는 송강호와 동서양 어디서도 통할 거 같은 매력적인 포스를 뿜어내는 고아성은 영화 내내 심드렁하게 겉돕니다. 캐릭터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죠. 이 열차의 보안 책임자였던 남궁민수와 다음 칸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는 요나는 원할 때마다 열차칸의 문을 척척 열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지만 정작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성취동기’가 부족합니다. 하다 못해 윌포드에게 철천지 원수 진 일이 있어 그걸 꼭 갚아야 한다든지, 아니면 그게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진실과 통한다든지 하는 확실한 동기가 그들에게 주어졌으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건 고작 1년에 한 번씩 세계를 뱅뱅 도는 ‘윤회’ 같은 이 지겨운 열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상에서 생존 가능성을 찾는 것뿐입니다. 이건 좀 맥이 빠지는 결론이며 안일한 통찰이죠. 



이상이, 엄청난 스케일과 비주얼, 쟁쟁한 스타들의 뛰어난 연기가 등장하는 만듦새 훌륭한 일급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설국열차]를 재미 없게 본 이유입니다. 물론 이 메모는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혀야 뒷탈이 없겠으나… 따지고 보면 개인적이지 않은 의견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저는 유명한 평론가나 기자도 아닌 일반 관객인데요 뭐. 그런 의미에서 매우 성급하고 편협한 영화 일기인지 알면서도 그냥 올립니다. 이건 그저 제 개인적인 블로그이고, 개인적인 페이스북 담벼락일 뿐이니까. ^^  



Posted by 망망디
,

깊은 통찰력과 막강한 연기력의 행복한 만남 – [마지막 4중주] 






주먹으로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데니스 호퍼는 자신을 고문하던 마피아들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해서 맛있게 빤 다음 엉뚱한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것도 아주 침착하고 흥미롭게 빙글빙글 웃어가면서.  “난 책을 좋아하지. 특히 역사책을 많이 읽었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한 가지 가르쳐 줄까? 니네 시실리아인들은 원래 곱슬머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천 년 전쯤에 무어인들의 피가 섞이면서 그렇게 된 거지. 깜둥이 말야. 그러니까 시실리아인들은 죄다 깜둥이의 종자인 거라고…니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깜둥이들하고 그짓을 한 거야...” 


얘기를 들으며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던 보스 크리스토퍼 월큰은 나중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그만 킥킥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데니스 호퍼도 그의 약을 올리느라 마주 보고 더 크게 웃죠. 하하하하하. 자세를 수습하려 돌아서던 월큰은 손으로 데니스 호퍼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포복절도를 합니다. 아아, 이 새끼 봐라 진짜 웃기네, 하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던 크리스토퍼 월큰, 결국은 참지 못하고 부하의 권총을 뽑아서 단숨에 데니스 호퍼를 쏴죽여 버립니다. “1984년 이후로 내가 누군가를 직접 죽이는 건 니가 처음이야!”라는 말과 함께. 



기억 나세요? 얼마 전 자살한 토니 스코트 감독의 영화이긴 하지만 매니아들 사이에선 무명 시절의 쿠엔틴 타란티노 시나리오로 더 유명한 영화 [트루 로맨스]의 한 장면이죠. 여기 나오는 크리스토퍼 월큰은 정말 카리스마가 넘치는 악역 전문 배우입니다. 몇 해 전 인사동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친구들 영화제’가 열렸을 때 아벨 페라라의 [킹 뉴욕]을 추천했던 류승완 감독은 영화가 끝나고 열린 간담회에 나와 “우리 월큰 형님이 나오는 장면에서, 우와!…”라고 흥분하며 크리스토퍼 월큰을 기렸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에서 여자 승객의 돈을 빼앗는 지하철 강도에게 “야,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건 어때? 하고 자신의 지갑 속 돈을 던지며 “생각 있으면 나중에 한 번 찾아오라” 고 말하는 장면은 실제로 월큰의 경험담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도 눈빛 카리스마가 장난 아닌 배우라는 얘기죠) 


자, 그런 전설적인 악역 전문 배우가, [퓨너럴]에서 숀 펜의 동생 크리스 펜과 함께 사악하게 웃던 그 보스가, [디어 헌터]에서 단 한 발의 탄환이 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끊임없이 러시안 룰렛을 해대던 그 슬픈 또라이가 [마지막 4중주]의 첼리스트로 나온다니. 얼른 상상이 안 갔습니다. 물론 크리스토퍼 월큰이 코미디 영화에 전혀 출연을 안 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백 번 양보해도 [수어사이드 킹]같이 살짝 맛이 간 상황의 ‘납치 당한 보스’라도, 결국은 카리스마 작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이 꺼지고 [마지막 4중주]가 시작되고 나니 조직의 보스 월큰 형님은 어디 가고 파킨슨병 진단을 받아 고뇌하는 노장 첼리스트가 거기 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푸가’라는 세계적인 쿼텟의 리더인 피터는 자신이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새 첼리스트를 구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곡으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결정합니다. 


얘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피터가 빠지게 된다는 건 25년 간 지속되었던 네 사람의 팀웍이 깨진다는 얘기죠. 타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제2바이올린인 로버트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 받쳐주는 역할만 하긴 싫다며 앞으론 때에 따라서 자신이 다니엘 대신 제1 바이올린을 맡을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다니엘이 당황하는 것은 물론 로버트의 아내이자 쿼텟의 비올라 연주자인 줄리엣도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동안 모두의 아버지와 같았던 피터의 리드 하에 가려져 있던 멤버들의 질투, 갈등, 욕심 등이 한꺼번에 표출되는 상황인 것이죠. 


자신을 만류하는 줄리엣에게 화가 난 로버트는 홧김에 알고 지내던 조깅 파트너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그 사건 때문에 둘의 사이는 더욱 벌어집니다. 게다가 로버트와 줄리엣 사이에서 태어난 대학생 딸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하던 다니엘이 그녀와 사랑에 빠져 동침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습니다. 얼핏 단조롭고 고귀한 척 할 수도 있었던 극은 이처럼 클래식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 ‘막장스러움’을 통해 인간적인 온기와 삶의 신산스러움을 함께 갖춘 입체적인 텍스트로 발전합니다.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던 피터는 자신이 마지막 연주곡으로 선택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의 의미에 대해 질문합니다. 


“당시엔 4악장으로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곡을 7악장으로 구성했으며, 악장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바로 연주하도록 했다. 40분 동안 쉼 없이 계속 이어서 연주해야 하는 이 곡은 연주하는 동안 악기의 튜닝이 풀리거나 연주자들의 하모니가 망가지기 마련이지. 그렇다면 연주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베토벤의 주문을 어기고 중간에 잠시 멈춰서 조율을 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연주를 맞춰 가며 끝까지 계속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할까?” 


좋은 텍스트엔 언제나 ‘인생의 메타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죠. 다큐멘터리를 찍던 야론 질버만 감독은 극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 베토벤의 곡을 통해 이기심과 이타심, 화합과 개성의 관계, 그리고 직업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을 관객에게 던지죠. 



이처럼 명확한 컨셉과 만듦새를 가진 이 영화는 기가 막힌 배우들의 열연으로 더욱 빛이 납니다. 무슨 연기를 시켜야 저 사람이 연기 못 한다는 소릴 한 번 들어볼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무슨 연기든 완벽하게 해내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물론 , 다니엘 역의 마크 이바니어와 줄리엣 역의 캐서린 키너도 명불허전입니다. 


리허설을 하면서 호흡을 고르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배우들의 긴장된 손끝 연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젊었을 때 카잘스와 만났던 장면을 회상하며 즉흥적으로 첼로를 켜는 크리스토퍼 월큰의 몸짓과 연기를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적당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악기를 연주할 땐 정말 악기를 배워서 실력으로 연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진 음색들이 계속 흘러 나옵니다. 


영화는 네 사람이 무대에 서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연주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연주 도중 한 사람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연주는 계속 이어지죠. [마지막 4중주]. 이 영화는 텍스트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막강한 연기력이 만나면 얼마나 멋진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게다가 귀를 황홀하게 해주는 정상급 연주들을 한 시간 반 동안 실컷 들을 수 있습니다. 얼른 가까운 극장으로 가십시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땐 아마 "아, 오늘 술 약속 취소하고 극장으로 오길 정말 잘 했어."라는 생각이 절로 나실 겁니다.






Posted by 망망디
,



대웅제약 우루사의 새 캠페인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사의 몸' 편을 먼저 봤는데 '괜찮다' 편도 좋군요. 그 동안의 '활력'이라는 효능효과 컨셉에서 벗어나 '시대'와 '인간'을 담으니 광고의 지평이 단박에 이렇게 넓어지는군요. 


선배 광고인 J.월터 톰슨은 "상품의 진실과 인생의 진실을 잘 합치하는 데서 광고의 힘이 발휘된다"라고 했습니다. 신자유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역설적인 화면과 카피로 표현한 이 캠페인, 힘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있기 때문이겠죠.




Posted by 망망디
,

전봇대

짧은 글 짧은 여운 2013. 7. 29. 05:29



누구에게나 힘든 일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보는, 일요일 아침.





Posted by 망망디
,



요즘 새벽에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새벽에 대한 오랜 오해가 풀렸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빈둥거리는 것뿐이다. 천천히 조간신문도 읽고 책도 읽는다. 인터넷도 한다. 그러면 낮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머리에 들어오고 마음에 들어온다. 모두 순하게 내 것이 된다. 


새벽에 일어나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어얼리 버드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뿐, 정말로 행복해지기는 힘들다. 새벽 한량이 되자. 오늘도 난 새벽 다섯 시부터 일어나 빈둥빈둥 재밌게 잘 놀았다. 노는 게 남는 거다. 재밌는 게 이기는 거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 한량이 되자. 



'짧은 글 짧은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먼 별  (0) 2014.01.03
전봇대  (0) 2013.07.29
비오는 날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스무가지  (0) 2013.07.10
심심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2) 2013.04.11
선운사 동백꽃  (0) 2013.03.18
Posted by 망망디
,

 

 

 

책과 연애하는 여자 이야기 -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아침에 일어나 무슨 책을 읽을까 서가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를 집어 들었다. 반쯤 읽다가 잠깐 ‘급한’ 다른 책을 본다고 덮어 그대로 책꽂이에 꽂아놨던 책이었다. (그래도 ‘요즘 읽는 책’ 코너에 꽂았다)

 

성수선은 직장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열혈 독서가다. 그리고 작가다. 나와는 십여 년 전 온라인을 통해서 인연을 맺고 서로 안부를 전하는 친구 사이이며 이젠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페친’이 되었다. 얼마 전 그녀가 ‘북포럼’에 저자로 출연했을 땐 직접 방청객으로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사실 오늘은 다른 책을 읽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부터 집어 들게 되었다. 아니, 잠깐 꺼내 무심코 책장을 넘겼는데 성석제의 [순정]을 다룬 챕터가 눈에 띄는 바람에 계속 읽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 이 작가도 나처럼 [순정]을 가끔 읽는구나. 지난번에 읽을 땐 그 맛이 또 조금 다르던데…하면서.


[밑줄 긋는 여자의 토닥토닥 에세이 -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는 그녀가 쓴 두 번째 독서 에세이다. 책 안에는 일반 직장인처럼 열심히 일을 하다가 퇴근 후면 확 달라지는 그녀의 일상이 들어있다. 그녀는 도대체 저녁마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돌아가 뭘 할까?


책을 읽는다.

 

혼자인 그녀는 오피스텔에 들어가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예전에 소설가 이병주가 [행복어사전]이라는 책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지금 집에서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병주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그녀는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가서 김영하를 만나고 장정일을 만난다. 레이먼드 카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소설가 제임스 쉘터나 김승옥, 그리고 시인 류근을 만나 심야식당의 손님들처럼 한바탕 영혼의 술판을 벌인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녀의 문체는 정직하다. 사실은 너무 바르고 정직해서 조금 더 풀어졌으면, 하고 아쉬워할 때도 있다. 소위 ‘범생이’의 느낌이 나는 것이다. 그건 대기업에 다니면서 늘 열심히 사는 그녀의 프로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저녁 8시면 문을 닫고 자기들끼리 노는 오피스텔 1층 라면집 아줌마 아저씨들을 부러워한다. 이건 이율배반이다. 마치 자기 별명을 ‘날건달’이라 지었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날건달은커녕 동기들 중에서도 가장 착실하게 광고회사 본부장님으로 잘 살고 있는 내 친구 류 모 씨처럼. 

 

늦게까지 하면 훨씬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면집은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영업을 종료했다.


며칠 전 팟캐스트로 ‘창비 라디오 책다방’을 듣다가 기생충학자 서민 교수가 “알라딘서재 시절 알던 분 중에요, 성수선 씨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다음부터 저를 멀리하고…”라고 눙을 치는 바람에 한참 웃다가 성수선 씨에게 일러바친 적이 있다. 물론 성수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는 만큼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피곤하니까 한 잔 한다’는 말은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다”라는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얼마나 훌륭한 술친구인지는 말 안 해도 다 알지 않겠는가. 마침 어제 페이스북에 [밑줄 긋는 여자]가 8쇄를 찍었다는 그녀의 자랑글이 올라왔다. 생각난 김에 다음 주쯤 술 한 잔 사달라고 졸라봐야겠다.

 

 

 

 






(* 예전에 제가 ‘음주일기’를 한창 쓰며 빈둥거리던 시절에 써놨던 [밑줄 긋는 여자] 독서일기도 있길래 찾아서 함께 올려 봅니다)


----------------------------------------

 

 



서점에 가면 좋은 점. 첫째, 공짜로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둘째, 후덥지근한 길거리와 달리 냉방이 잘 돼 있어서 시원하다. 셋째, 누군가 전화를 해서 “지금 어디야?”라고 물으면 “응, 지금 서점에 있어.”라고 고상한 척 폼 잡으며 대답할 수 있다…

 

요즘은 서점 나들이에 재미를 붙여서 오후엔 대개 고속터미널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논다. 집에 있으면 자꾸 TV를 틀거나 멍하니 쓸데 없는 짓거리만 하다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요즘 서점에 가서 읽은 책들은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 그리고 성수선의 [밑줄 긋는 여자] 등이었다.

 

나는 성수선이란 작가를 ‘수선 님’이라 부른다. 몇 년 전 한겨레에 소개된 인물 기사를 보고 책꽂이 사이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그녀의 홈피까지 찾아갔었는데, 거기에 있는 수 많은 독서일기와 에세이들을 읽느라 자주 들락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방명록에 가서 ‘독서일기를 쓰는 분께 음주일기를 쓰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긴 뒤 친하지는 않지만 간간히 온라인으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밑줄 긋는 여자]는 수선 님이 [나는 오늘도 유럽 출장 간다]에 이어 내놓은 두 번째 책이다. 이번 책은 굳이 구분을 하자면 독서 에세이에 속하겠지만 대개의 작가나 학자들처럼 심각하게 폼 잡고 서평을 쓰는 에세이가 아니라 자신의 일과 생활, 생각들을 풀어놓으면서 거기에 자연스럽게 책들이 스며드는 미셀러니에 가깝다.

 

이런 글쓰기의 현실감은 현재 해외영업 전선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저자의 남다른 이력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현재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부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해외 영업을 다니는 한편 대학원에서 MBA과정까지 공부하는 저자가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쓴 글들이기에 각 편마다 에피소드들도 풍부하고 현실감이 넘친다.

 

 

도쿄에 출장을 가서는 [돈까스의 탄생]이란 책을 떠올리고 독일에서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원서를 찾아 다니는 도중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는 식이다. 일본 출장을 가서인가 회사 상사에게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장미 도둑]을 선물하고 ‘너는 어쩌면 하는 짓도 이렇게 이쁘니?’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에피소드는 참 재치가 있다. 그 상사의 방에는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가 열 권도 넘게 있더라는 것이다. 다들 성의없이 달착지근한 자기계발서 따위를 반복해서 선물할 때 삶의 애환과 아이러니가 배어있는 아사다 지로의 소설책을 선물한 부하 직원이 있었으니 어찌 이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과 그에 따른 상념마다 공지영, 박민규, 김영하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거론된다. 콘돔은 물론 꽃다발까지 자판기에서 판매되는 외국 출장지에서는 대학 신입생 시절 장미꽃다발을 신문지에 싸서 선물했던 동기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백만 번 산 고양이]를 읽으면서는 늘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이라 믿었던 이성 친구의 결혼 소식에 받은 충격을 얘기하며 평생 자기 짝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수선 님의 장점이자 단점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심플한 마인드다. 책을 내는 저자라면 좀 현학적으로 굴 수도 있고 쿨한 척 할 수도 있는데, 이 여자는 글 곳곳에 급하고 솔직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은 외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질질 흘리고 다닌다면서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를 권하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엉엉 울어버렸던 사실까지 거침없이 고백한다. [백지연의 SBS전망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패널로 고정출연을 했던 추억을 애기할 때도 앞으로 그런 프로그램이나 TV 출연까지 기회만 된다면 또 하고 싶다는 소망을 숨기지 않는다. 어쩌면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러한 면모가 작가로서의 ‘가오’는 덜 서게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참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친한 친구와 술집에서 만나 대화를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힘들고 지친 일상들을 얘기하며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에 공감하고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를 읽은 사람들 중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다가올 월요일 생각에 우울해지는 친구가 또 하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동병상련의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우리는 모두 바쁘게 산다(나는 전혀 안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그렇다. 수선 님도 바쁘게 사는 게 몸에 배어서 그런지 늘 바쁘고 늘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첫 책을 출간하고 나서 휴가로 괌에 갔을 때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리라’ 다짐했건만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거 같은 강박에’ 스노쿨링 강의에 하루 세 번씩 참가했다는 글을 읽고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가하게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책상에 처박혀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저자가 딸에게 건낸 ‘작가가 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세상살이의 기쁨과 슬픔, 스트레스를 경험하지 않고는 인생의 비밀도 제대로 풀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앞으로도 열심히 회사를 다니면서 또 이런 책들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녀에게서 자극을 받고 자기계발서 대신 소설책을 집어들 것이고 일반인들도 글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서 ‘코카콜라 회장의 신년사’ 같은 파급력 높은 글을 쓰게 될 것 아닌가.

 

 

지금 서점에 가면 카를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보다 성수선의 [밑줄 긋는 여자]를 찾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이번 휴가를 떠나기 전에 들었는데 이미 2쇄를 찍었다고 한다. 그녀의 책을 펼치면 목차 전 페이지에 ‘No Rain, No Rainbow”라는 글이 써 있다.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꾸만 뭔가 저지르는 여자,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과 참으로 비슷한 저자. 그녀의 책을 권한다.

 

 


Posted by 망망디
,

 


외출 했다가 동네 수퍼에 들렀는데 문득 캔커피가 사먹고 싶어지는 겁니다. 요즘은 늘 집에서 원두커피를 내려서 먹곤 해서 캔커피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캔커피를 하나 들고 와 계산을 하면서 저는 예전에 60만 원짜리 커피를 마셨던 쓰라린 기억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10여 년 전의 일이니 꽤나 비싼 커피를 마신 셈이죠.

 

 

제가 TBWA/Korea라는 광고대행사를 다닐 때였습니다. 12월 말에 웬일인지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들에게 노트북을 하나씩 지급한 사건이 있었죠. 워낙 연봉도 세고 직원들에게 잘 해주기로도 이름난 잘 나가는 회사이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좀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회사의 카피라이터들은 신이 났습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카피라이터. 생각만 해도 멋진 일 아닙니까.

 

1월 업무 첫날, 시무식을 마치고 돌아온 저는 회사에 있는 밴딩머신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가지고 제 책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자, 이제 일을 시작해 볼까? 하고 노트북을 열고 종이 커피잔을 집는 순간, 커피잔이 살짝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노트북 자판에 가서 팍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어, 어, 앗, 아악! 안 돼~!!!”

 

 

커피는 이미 노트북 자판 위로 쏟아졌고 제 입에선 알 수 없는 비명들이 쏟아졌습니다. 얼른 전원선을 뽑고 전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거꾸로 들어 흔들고 별짓을 다 해봤지만 노트북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차라리 물을 쏟았으면 얼른 전원을 끄고 거꾸로 해서 말리면 되는 수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커피는, 특히 자판기 밀크커피는 설탕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자판에 들러붙어 부품들을 빠르게 부식을 시킨다는 겁니다.

 

아, 새해 첫날부터 이게 뭐람.

 

저는 이 비극적인 소식을 경원지원팀에 알려야 했습니다. 경영지원팀 차장님이 와서 노트북을 가져가더니 좀 있다가 전화를 걸어 저를 위로하더군요. 차라리 데스크탑이었으면 자판만 갈면 되는데 이건 노트북이라 전체를 바꿔야 한다. 이 노트북이 120만 원짜린데 수리비가 물경 80만 원이란다. 그러니 차라리 새 노트북을 사는 게 낫다. 우리, 새 노트북을 사도록 하자. 근데 너무 비싸다. 회사에서 반을 부담할 테니 편성준 씨가 반을 부담해라. 거의 한 번도 안 쓴 노트북인데, 참 안 됐다.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토를 달지 않고 그러자고 순순히 동의를 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경영지원팀이랑 잘 못 지내는 편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 예로, 그 전 해 겨울에 회사 동료들하고 스키장 갔다가 오는 길에 삼성동 글래스타워 앞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무릎을 크게 다쳤을 때도 저는 병가를 내지 못했습니다(후배의 차는 폐차를 시킬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경영지원팀 왈, 다친 건 알겠는데 그게 일하다가 다친 게 아니라 놀러 갔다 오며 다친 거라 병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몹시 화가 난 저는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졌지만, “그런 법이 있다”는 차장님의 침착한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의 아니게도 며칠간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무단결근’을 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참 멍청한 선택도 많이 했고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항상 손해 보는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결국 예쁘고 착한 아내와 결혼도 했고 주변에 괜찮은 친구들도 꽤 많은 인생이니까요. 이젠 심지어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한 연설이 생각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했던가요? 저도 계속 그의 말처럼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비록 앞으로도 제가 하는 선택들이 ‘hungry’보다는 ‘foolish’에 가까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Posted by 망망디
,



문방구에서 팔던 장난감 같은 영화 - [퍼시픽 림] 



영화 [퍼시픽 림]에 에 나오는 ’카이주’는 괴수의 일본 발음이라죠. 외계인은 늘 하늘에서 날아오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태평양에서 괴물들이 출현해 도시를 파괴하고 다니는 겁니다. 외계인들이 수억 년 전 공룡시대에 지구에 왔다가 ‘아, 아직 때가 아니구나’하고 그때부터 진득하니 기다렸다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거죠. 


카이주라는 이름부터 그 괴물들을 쳐부수는 로봇 ‘예거’를 두 명이 조종한다는 설정, 그리고 괴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난감처럼 무력하기만 한 탱크와 비행기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오타쿠 맞습니다. 오덕입니다. 마징가Z나 로보트태권V같은 캐릭터들이 우리나라 만화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저희 세대랑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영민했던 저는 철이가 마징가Z의 조종관으로 들어가 기어를 조종하면서 “화이야, 온!”이라 외치는 걸 보고 일본 만화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화의 주인공들은 왜 기어나 버튼을 조작하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요? 기합 넣는 건가? 아직도 궁금해요) 



이 영화의 ‘좋은 로봇’ 예거는 마징가나 그레이트 마징가, 태권V처럼 버튼이나 기어 대신 두 명이 직접 몸을 움직여 조정하는 일종의 ‘모션 트레이스’ 방식입니다. 브라이언 브라운이 [F/X]에서 썼던 그 특수장비 옷처럼 말입니다. 아, 얼마 전에 휴 잭맨이 나왔던 [리얼 스틸]도 대충 이런 식이었군요. 


이 작품은 캐릭터도 좀 뻔하고 인물들간의 갈등구조나 해소도 고만고만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진격의 거인]처럼 진지하게 벽을 쌓아 괴물을 막는 어이없는 설정도 나옵니다. 대신 로봇들의 질감이나 규모는 진짜 현실감 넘칩니다. 시가지에서 괴물과 싸우느라 거침없이 부서져 나가는 건물과 자동차들은 그야말로 스펙터클합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그리운 장난감 같은 이 작품을 보고 ‘대도시파괴성애자를 위한 영화’라는 글을 누군가 인터넷에 올렸다는 얘길 듣고 한참 웃었습니다. 


여주인공 마코 모리 역의 기쿠치 린코는 좀 안습이더군요. 그렇게 이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고 눈만 큰 여자애. 브래트 피트 주연의 [바벨]에 나올 때는 그렇게 인상 깊었었는데. 린코 대신 배두나가 맡았어야 했다는 어느 페친의 말씀에 많이 동감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보다 이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무신경함이 더 큰 패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공감 가는 점도 많은 영화입니다. 우선 이런 블록버스터마다 등장하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없어서 좋습니다. 물론 대사는 모두 영어로 나옵니다만 이 영화에서 미국은 그저 ‘태평양연안(퍼시픽 림)’의 동맹군일 뿐이죠. 그리고 두 명의 조종사가 ‘드리프트’를 해야 한다는 설정도 재미 있었습니다. 드리프트는 서로의 경험과 생각, 심리상태 등을 모두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런 걸 하게 되면 서로의 성적 취향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결국 “이런 변태새끼!” 소릴 할 만도 한데, 어린 관객을 위해 그런 건 다 그냥 넘어가는군요.  


영화 종반 즈음, 괴수들의 공격으로 최신 예거들이 동작을 멈췄을 때 제일 처음 만들어졌던 구닥다리 예거가 나서서 세계를 구하는 장면이 나오죠. 디지털 기반의 기계들이 어떤 에러로 인해 동작을 멈추었을 때 바보 같은 아날로그가 나선다는 이 설정은 기성세대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따뜻한 위로이자 찬가일 겁니다. 찡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죠. 제기랄. 


전 이 영화를 공짜표로 보았습니다만, 뭐 돈을 내고 봤다고 하더라도 재미있게 즐기며 봤을 것 같습니다. 거창한 기대나 새로운 선언 없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소소하게 떠들면서 볼 수 있는 그런 정감 있는 영화죠. 제가 볼 때는 옆에 초등학생, 앞에 중학생들이 앉아서 함께 떠들면서 봤는데 걔들이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서로 내용도 물어보고 하는 게 오히려 정겹고 좋았습니다. 



영화 보면서 웃었던 거 하나. 이런 영화에서 대장들은 아무리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입만 열면 다른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지고 연설하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리게 마련이죠. 이 영화에 나오는 저항군 사령관 스탁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설하는 목소리는 기름지고 호흡도 여유롭습니다. 배경음악도 우퍼가 진동할 정도로 장엄하게 깔리죠. 다른 영화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경찰청장이나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들도 연설 참 잘 합니다. 그런데 실제 세계에서는 왜 다들 그렇게 목소리들이 쫌팽이 같을까요? 억양이나 발음도 후지고. 


전 박원순 시장을 좋아하는데, 서울시장 선거전 할 때 TV토론 본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상대 후보 나경원의 똑부러지고 앙칼진 말솜씨에 비하면 그 분은 얼마나 어눌하고 느려터지던지. 박 시장님, 어렸을 때 웅변학원 같은 데 좀 다니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응원합니다. 존경하구요. 음. 뭐 결론이 좀 이상하네요. 하지만 고치지 않고 그냥 가겠습니다. 이건 그냥 비 오는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김에 마구 쓰는 영화 수다니까요. 영화평이 아니고. 




Posted by 망망디
,

[여덟 단어]에 이어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독서일기도 다시 꺼내 봤습니다. 네이버같은 포털에서 이미 읽으신 분들도 혹 계시겠지만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읽어 봅니다. 이거 뭐, 하다보니 저 혼자 '박웅현 특집'이네요.^^ 





다시는 광고인이 낸 책을 구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는, 어느날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라는 따끈따끈한 새 책을 발견하게 된다. 에잇, 또 광고책이군. 책값도 더럽게 비싸네.(17,500 원이다) 심드렁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책을 들쳐보던 나는 두 시간 동안 꼼짝않고 책 속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읽을 분량이 반 정도 남은 그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서고 말았다. 젠장.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엄밀히 말해서 광고인이 낸 책이 아니다. 광고를 하는 박웅현 CD를 출판기획자이자 컬럼니스트인 강창래가 만나 오래도록 인터뷰하고 함께 어울려 고민도 하고 해서 펴낸 공동저작이다.

 

 

어떤 사람은 연애편지를 보낼 때 "보고싶습니다" 라고만 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려지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라고 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더 잘 전달되겠는가. 박웅현은 정지용의 이 시를 인용하면서 광고 커뮤니케이션은 '보고 싶다는 말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말한다. 가령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 것은 당장 광고 아이디어를 내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기초 체력을 기르는 데는 보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넉 달 간, 한 첩의 보약을 먹듯 [토지]를 읽었다' 고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받쳐주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아이디어가 되고 소재가 된다. 길 가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는 사람을 보고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타심'을 새삼 환기한 그는, 이를 그대로 광고에 넣는다.

 

 

 

왜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우십니까?

왜 날아가는 풍선은 잡아주십니까?

왜 흩어진 과일은 주워주십니까?

왜 손수레는 밀어주십니까?

왜 가던 길은 되돌아가십니까?

  

사람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소양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그는 베네통 광고의 사진을 찍었던 올리비에르 토스카니의 일화를 얘기해준다. 수녀와 신부의 키스 장면, 천사와 악마로 분장한 백인과 흑인 아이의 포옹 장면, 흑인 여성의 젖을 빨고 있는 백인 아기의 사진 등 수많은 화제작을 남긴 토스카니가 [아카이브]라는 잡지와 인터뷰를 할 때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웅현은 공산주의라는 돌발적 주제에 대해 이렇게 잘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큼 철학적 인문학적 깊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섭지 않다"는 말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강창래가 따라가서 목격했다는 박웅현의 상공회의소 강의다. 주제는 '한국에서 효과적인 광고 캠페인'이었는데 이제 곧 한국에 와서 커뮤니케이션을 펼쳐야하는 외국인들에게 해야하는 강의였다.

 

그때 박웅현의 첫 마디는 "저는 한국말로 하겠습니다."였단다.

 

"제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영어로 말하는 순간 제 지적 수준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석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석사 학위를 가진 지적 수준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박웅현은 이날 동시통역사를 대동하고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는 좋은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과감한 장치이기도 했고 프리젠테이션의 주제를 더 깊게 부각시키는 효과까지 발휘했다. 아무리 칸이나 뉴욕페스티벌에서 상를 타는 광고라도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에 맞지 않으면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우리는 버드와이저의 'wazzaup~'광고를 쉽게 이해 못한다)을 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동시통역사를 쓰는 것으로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내용과 형식이 강의 내용과 제대로 맞아들어간 적절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우리말을 잘하는 외국인이 있다고 해도 언어만 알아서는 그 문화에 깊이 젖을 수 없는 것이고,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웅현은 2002년 월드컵과 촛불집회라는 사회적 이슈 속에서도 또다른 통찰을 발견한다. '아디다스'라는 광고주에게 팔려고 만든 이 광고는 결국 집행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기에 인용한다.

 


촛불

  

믿지 못할 일이었다.

월드컵 16강

거리는 기쁨에 넘쳤다.

같은 시각

또 하나의 믿지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언론은 크게 다루지 않았다.

미군은 책임이 없다는 발표를 했고

정부는 침묵했다.

두 명의 소녀가 죽었는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 네티즌이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촛불을 준비해주십시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제안이었다.

한 개의 촛불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밝힐 수 있을까?

상대는 미국의 군대였고

모든 이의 시선은 월드컵을 향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촛불이 옮겨 붙었다.

그해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진입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해 한 개의 촛불이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와 작년 '그리고 대학에 떨어졌습니다...수험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광고 모두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 속에서 한 기업의 다짐과 의견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대를 읽고 인간을 연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다.

 

 

박웅현은 나도 전에 3년 남짓 다닌 적이 있던 광고대행사 TBWA/Korea의 ECD다.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적이 있다. 젊은 작가 전아리와 함께 출연했었는데, 나는 그때 그가 진정으로 부러웠다. 광고인으로서 독서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게 부러운 게 아니라 광고인이 TV에 나와서 광고 얘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부러웠던 것이다.

 .

며칠 전 TBWA/Korea에서 박웅현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이문선의 사무실에 카피 회의때문에 갔다가 이 책 얘기를 해줬더니, 그는 박웅현에 대해 이런 표현을 했다.

 

"나는 세상엔 두 가지 CD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웅현과 박웅현이 아닌 CD."  

 

이런 게 바로 최고의 찬사다. 쉣.

.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