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은 복잡하지만 법칙은 단순하다”

 – 박웅현이 전하는 인생의 ‘단순한’ 법칙들 [여덟 단어] 




은퇴했지만 제가 좋아하는 CF 감독, 김규환 씨와 호주로 촬영을 간 적이 있어요. 촬영장엔 외국인 모델들이 캐스팅을 위해 찾아왔었어요. 우리가 선택을 하는 입장인데도 180센치미터가 넘는 금발의 여자들이 쭉 서 있으니까 이쪽에서 다들 기가 죽었죠. 그런데 김규환 감독이 가더니 “어 그래, 이 친구 괜찮네”라면서 한국어로 의견을 말하고 통역을 시켰어요. 만약 영어로, “You beautiful” “I like it”, 이런 식으로는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절반도 전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김규환 감독은 모델들을 찬찬히 살피고 한국어로 의견을 전달하고 통역사에게 말을 전하게 했죠. 당시에 그 눈빛에 모델들이 압도돼서 떨더라구요.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나요? 외국어라고, 외국인 모델과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말을 꼭 영어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여덟 단어]라는 책을 읽을 때 저는 특히 이 부분에서 신선함과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많이 마주치게 되고 괴로워하게 되는 ‘권위’에 대한 챕터였는데요, 박웅현은 여기서 저의 광고 선배이자 개인적으론 홍익대학교 학생 동아리 ‘뚜라미’의 선배인기도 했던 규환이 형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불합리한 권위에 굴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박웅현의 신작 [여덟 단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자세들을 여덟 개의 단어로 나눈 뒤 각 챕터마다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책입니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서 쓴 게 아니라 20,30대들을 모아놓고 매주 강연한 내용을 따로 옮긴 거니까 에세이라기 보다는 강연록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거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걸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공자나 부처, 예수를 능가하는 수퍼맨이거나 사이비종교의 교주쯤 되겠지요. 박웅현도 말합니다. 인생은 강의 몇 번 듣는다고, 책 몇 권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스스로에게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통찰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들은 왜 남자친구한테 "김태희가 이뻐? 내가 더 이뻐?"라는 질문을 하죠? 김태희가 더 이쁘고, 하지만 난 널 사랑해. 5만원이 비싸? 100원이 더 비싸? 이런 거잖아요.” 성시경, 재밌다. 하하하. 



어제 제 페이스북 친구 김정욱 씨가 올린 글입니다. 성시경이 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은 모양이죠? 이번 책 [여덟 단어]는 ‘자존’이라는 글자로 문을 엽니다. 우린 모두 김태희처럼 예쁠 수도 없고 고소영이 될 수도 없죠. 고소영한테 왜 김태희처럼 예쁘지 않냐고 따지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모든 ‘엄친아’ ‘엄친딸’들은 이런 어불성설을 먹고 자라납니다. 남과 비교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존’이죠. . ‘나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그리고 나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개성과 능력을 가진 독립체들이니까요. 


그런데 남들과 비교되는 순간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알랭 드 보통도 [불안]이라는 책에서 이런 경험을 토로하죠. (그러나 쾌적한 집에 살며 편안한 일자리로 출퇴근한다 해도 경솔하게 동창회에 나갔다가 옛 친구 몇 명((이들보다 더 강력한 준거집단은 없다))이 아주 매력적인 일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우리 집보다 더 큰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왜 이리 불행하냐는 생각에 정신을 못 가누기 십상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 성공한 케이스로 박웅현은 [나무열전]이라는 책을 쓴 사학자 강판권 씨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촌놈’출신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학자라죠? 이러한 자존의 성찰은 자연스럽게 ‘본질’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박웅현은 남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게 힘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단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과정을 다시 떠올리며’본질’의 문제를 풀어갑니다. 남들보다 잘 하자, 가 아니라 ‘내 얘기를 내 방식대로 잘 전달하자’고 생각을 바꿨을 때 그는 비로소 프리젠테이션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영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릴까,하고 자책하는 대신 “잘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땀 흘리려고 하는 거니까”가 본질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간단한 이치죠? 


본질(本質). 


저는 이 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씁니다. 그런데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라는 에르메스 브랜드의 지면광고 카피만큼 본질을 한 마디로 표현한 예는 드물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이죠. 예를 들면 사람들의 웃음 같은 거.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웃음, 기쁨, 감동, 행복, 공감 등 몇 가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지난 학기 제게 강의를 들은 학생 중에 학점에 불만이 있다고 이메일을 보낸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제가 내준 과제를 빠짐없이 성실하게 다 했고 밤새워 ‘프레지(Prezi)를 배워 기말과제도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파워포인트에 글이나 그림을 올리고 링크시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저에게 프레지 같은 프리젠테이션 도구는 그야말로 신세계처럼 멋진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콘텐츠’였습니다. 저는 그 학생보다 더 투박하지만 좀 더 아이디어가 살아있는 과제물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웅현은 ‘촛불’을 예로 들어 콘텐츠의 힘을 역설합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죽은 이의 영혼이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라는 어느 네티즌의 제의에 의해 일파만파 퍼져나갔던 촛불의 힘. 이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촛불시위로 번져갔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의무감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좋은 콘텐츠는 미디어가 무엇이든 퍼지게 되어 있다는 것. 광고를 하는 저희들 머릿속에도 늘 이런 생각으로 가득하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까요? 리처드 파인먼은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서 “현상은 복잡하다. 그러나 법칙은 단순하다.”라는 중요한 힌트를 던져줍니다. 잡다한 지식이나 곁가지 상황들을 걷어내고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통찰에 집중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이죠. 인구에 회자되는 지구상의 모든 강력한 콘텐츠들은 다 그렇게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기초체력을 기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다시 ‘책 읽기’라고 박웅현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전작인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나 [책은 도끼다]같은 경우에서도 늘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저자는 자신이 신문보다는 단행본을 즐겨 읽는 이유도 신문은 그냥 흘러가는 느낌인데 비해 책은 집중해서 다 읽고 나면 뭔가를 얻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밑줄을 치게 되고 다시 펼쳐보게 되고 그러다가 이런 시도 발견하게 되니까요.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 이라는 시입니다. 며칠 전에 제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분이 먼저 쓰신 [여덟 단어] 리뷰에서 이 시를 올리셨더라구요. 저도 한 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년 창비





시인이라서 이런 눈을 가지게 된 걸까요?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자세히, 마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살면서 열심히 본다는 것(見) 역시 참 중요한 것이죠. 이 책에서는 자존에서 시작해 본질, 클래식(고전), 본다는 것, 현재 등등의 단어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 단어들은 모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첫 물음에 대한 답의 단서들을 품고 있는데 어떤 때는 안도현이나 고은 시인의 시로 설명되기도 하고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아포리즘이나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문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눈만 뜨면 정보가 넘쳐나고 인터넷, 모바일 기기들이 24시간 옆에서 나를 끊임없이 간섭하는 시대. 이는 곧 ‘결핍이 결핍된’ 역설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예전엔 구하기도 힘들었던 책들이, 영화들이 이젠 너무 많아서, 구하기가 너무 쉬워져서 제목만 읽었는데도 이미 그걸 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읽기만 하고 생각을 안 하면 남는 건 제목뿐입니다. 박웅현이 강조하는 인문학도 바로 그런 것이죠.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고전이 왜 중요한지, 발견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은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한 가지를 보더라도 ‘깊게’ 읽고 느낌으로써 본질적인 것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잘 나가는 광고인들 중에는 욕을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사 일은 안 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며 강의나 심사위원만 하다고 욕 먹고, 해외광고제 같은 데 가서 자료들을 잔뜩 선점해 뻔한 광고책 쓴다고 욕 먹고, 실력에 비해 과대평가 되어 방송에만 자주 나온다고 욕먹고. 어쩌면 박웅현도 그런 사람일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그냥 광고 얘긴데 박웅현이 내는 책만 왜 유독 ‘인문학’ 딱지를 붙여주느냐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웅현을 이 책에서 배우고 함께 궁리해 본대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박웅현이 계속해서 이런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뭘까요? ‘자존’을 생각한다면 남보다 더 인정받는 광고인이나 유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닌 거 같구요. ‘현재’를 생각한다면 노후를 위한 꼼수로 이러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권위’라는 챕터에 비춰보면 우리는 ‘똑똑하고 잘난 박웅현’한테 주눅들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겠죠. 


잘은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그저 박웅현이 책 말미에 쓴 대로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라는 그의 주장으로 만들어지는 ‘박웅현의 인생’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앞으로도 흥미롭게 천천히 지켜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 독서일기를 쓰기 전에 제법 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메모했었는데, 쓰면서 대부분 버렸습니다. 이런 책은 남의 리뷰만 휘리릭 훑어보고 ‘음, 무슨 얘긴지 대충 알겠네.’라고 넘겨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까요. 그러니 지금 제 리뷰를 대충 읽어보신 뒤 얼른 책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책상 옆에다 놓고 인생이 막연해질 때마다, 자신이 무능해 보일 때마다, 싫은 놈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울 때마다 한 번씩 들쳐 보시기 바랍니다. 정답이야 얻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유용한 힌트 몇 개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


방금 페이스북에서 보고 공유한 필름인데, 여기에도 또 올립니다. 그만큼 좋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인싸이트를 이토록 공감 넘치게, 디테일하게, 이 짧은 시공간 속에 다 집어넣다니요. 대단하죠? 사진을 찍을 당시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들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뒷부분에 나오는 사진 결과물 덕분에 더 가슴 뭉클해지네요. 


최근 미국에서 제작된 캐논의 해외 광고인데요, 2013년 칸느 광고영화제에서 FILM부분 SILVER수상작에 선정되었답니다. 'Long live imagination'...예전 캐논의 카피, "촬영은 죽이지 않는 사냥이다"만큼 좋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

최근에 몇 달 간 이런저런 사정으로 놀았더니 일감이 똑 떨어지는 바람에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리서 스스로 일을 구한다는 청탁서를 페북에 올렸죠.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라는 글이었는데 반응은 매우 뜨거웠지만 정작 일은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2탄으로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2’라는 글을 또 올렸습니다. 이번엔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셨고 일을 연결해 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역시 페북에다가 음식사진만 찍어 올리는 것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올리자고 생각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조금은 쑥쓰럽고 창피했던 제 글에 ‘좋아요’로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 그리고 공유를 해주신 선배, 후배, 친구 여러분,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글이 좋다며 다시 읽고 싶어하는 분들이 좀 계셔서 1,2편을 모아 제 홈피에 올립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밥을 많이 먹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술을 많이 마시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나이는 좀 있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카피라이터지만 홍보영화 시나리오도 잘 씁니다.
카피라이터지만 CD(Creative Director)도 잘 합니다.
카피라이터지만 비주얼 아이디어도 잘 냅니다.

 

강의도 잘 하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프리젠테이션도 잘 하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칼럼도 잘 쓰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지금 일을 찾고 있습니다.

 

이름은 편성준.

 

1993년부터 여러 대행사를 다니며, 프리랜서를 하며
카피라이터로 살아왔습니다.

 

최근에 모친상•결혼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치르느라
생업인 광고 일을 좀 등한시 했더니,

소에 심각한 얘기 쓰기 싫어서 

페북에선 늘 잘 지내는 척만 했더니,

 

언젠가부터

 

프리랜서 명함이 무색할 정도로
일감이 뚝 끊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페친 여러분들께 보내는
청탁서입니다.

 

주위 분들에게 괜찮은 카피라이터가
지금 놀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전해주십시오.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고
일을 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자존심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추천해 주신 분 창피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혹시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 찾는 분께
저를 추천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 은혜 당장 갚진 못하겠지만
고마운 마음에
술 석 잔이야 못사겠습니까?

 


편성준 배상.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2

 

 

 

아내는 제가 설거지를 잘 한다고 칭찬하지만
저는 카피라이팅에 훨씬 더 소질이 많습니다.

 

친구들은 제게 드라마 작가 한 번 해보라고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카피라이터로 잘 살아왔습니다.

 

교수님들은 제 강의가 학생들에게 인기라고 하시지만
저는 소비자들에게 인기 있는 광고를 만드는 게 더 행복합니다.

 

카피라이터지만 홍보영화 시나리오도 잘 씁니다.
카피라이터지만 CD(Creative Director)도 잘 합니다.
카피라이터지만 비주얼 아이디어도 잘 냅니다.

 

강의도 열심히 하지만 카피를 더 열심히 씁니다.
프리젠테이션도 똑소리 나지만 카피가 더 똑소리 납니다.
칼럼도 곧잘 쓰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지난 주에 놀던 카피라이터, 아직도 놀고 있습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지금 일을 찾고 있습니다.

 

이름은 편성준.

 

1993년부터 MBC애드컴, TBWA/Korea 등 여러 대행사를 다니거나
프리랜서를 하며 카피라이터로 살아왔습니다.

 

최근에 큰 조사 하나와 큰 경사 하나를 치르느라
생업인 광고 일을 좀 등한시 했더니,

 

평소에 앓는 소리 하기 싫어서
페북에선 늘 잘 지내는 척만 했더니,

 

언젠가부터

 

프리랜서 명함이 무색할 정도로
일감이 뚝 끊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지난 주에 이어
페친 여러분들께 다시 보내는
청탁서 2탄입니다.

 

일주일간 ‘좋아요’만 수백 번 쏟아지고
아직 일은 한 건도 안 쏟아졌습니다.

 

주위 분들에게 괜찮은 카피라이터가
지금 놀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전해주십시오.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고
일을 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자존심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추천해 주신 분 창피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혹시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 찾는 분께
저를 추천해 주십시오.

 

이 농담 같은 청탁서를
진담으로 받아들여 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고마운 마음에
서울 어느 흐린 주점으로 모시고 가
소주 한 잔이야 못 올리겠습니까?

 


편성준 배상.

Posted by 망망디
,

 

 

 

오늘밤 EBS ‘한국영화특선’에서에서 이창동의 [밀양]을 다시 하네요. 2007년도 영화입니다. ‘생일번개’로 친구들과 이 영화를 본 다음날 집에서 꼼짝 않고 오후 내내 영화일기를 쓰다가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다시 들어와 마저 완성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제가 쓴 영화일기 중 가장 집중해서, 가장 괴로워하면서, 그리고 가장 행복해하면서 쓴 글이 아닐까 합니다. 제목도 없고 좀 긴 글이지만 그래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 오랜만에 다시 꺼내봅니다.

 

 

------------------------------------
 
여러분 안녕? 저, 신애예요. 이신애. [밀양]의 주인공이요. 며칠 전 전도연씨가 칸에서 상 탄 소식 듣고 저도 무척 기뻤어요. 혹시 [밀양] 아직 못보셨어요? 어머, 그럼 이 글은 읽지 마세요. 저도 스포일러라고 욕먹고 싶진 않거든요.

 

 

[밀양]보시는 동안 힘드셨죠? ㅋㅋ…죄송해요. 제 팔자가 좀 세야 말이죠. 사실 남편 고향이라고 밀양 내려간 건 순전히 제 오기였죠. 죽은 남편이 바람 피운 것도 인정하기 싫었고, 사랑에 배신당한 여자라구 동정 받는 것도 싫었거든요. 그래서 ‘오냐, 내가 얼마나 잘 살아내는지 한번 보여주마!’라는 마음으로 내려간 거였어요. 괜히 센 척 한 거죠. 안 그러면 전 재산 780만원 남은 년이 땅은 왜 보러 다니고 그랬겠어요.
 
우리 쭌이 보셨죠? 예쁘죠? 진짜 너무 예뻐요! 근데 그렇게 이쁜 애를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미치겠더라구요. 처음 범인의 전화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제가 밀양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겨우 종찬 씨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달려갔는데 이 남자, 혼자 카센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예요. 미치는 줄 알았어요. 정말 애는 돌려줄 줄 알았는데. 걔가 무슨 죄가 있다구 그렇게 죽여요? 그게 사람이에요? 당장 패 죽이고 싶었어요. 찢어 죽이고 싶었어요. 그 놈 죽이고 저도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쭌이 사망신고를 하고 나오다 동사무소 앞에 잠깐 정신을 놓고 쓰러졌었는데 그 때 마침 ‘상처 받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회’ 라는 현수막이 보이더라구요. 약국 아줌마가 예수 믿으라고 치근덕댈 땐 이게 왠 헛소린가 했는데 그 땐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이 향하더라구요. 이런 게 바로 성령인가 싶었죠.

 

무턱대고 들어가 의자에 앉았는데 처음엔 계속 기침만 나왔어요.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냥 울음이 쏟아지는 거예요. 무슨 둑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요. 도저히 울음을 그칠 수가 없더라구요. 사실 우리 쭌이 보내고 나서 그때처럼 후련하게 울어본 게 처음이었어요. 목사님이 와서 제 머리에 손을 얹으시는 순간 온 몸이 짜릿하게 떨리고, 아 이제 살겠구나 싶었어요. 전 그날 처음으로 잠을 아주 푹 잤어요.

 

 왜 하필 기독교냐구요? 저도 이창동 감독님한테도 물어봤죠. 왜 하필 교회냐구. 그랬더니 ‘기독교만큼 사람들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종교가 또 있냐?’고 하시더라구요. 맞는 말이에요. 제가 만일 교회 대신 절이나 성당에 갔었으면 그토록 빠르고 그토록 절실하게 구원과 평화를 얻지는 못했을 거 같아요. 제가 만난 신이 하필 하나님이었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좀 극성스럽긴 해도 이건 단순한 종교영화나 반기독교 영화는 절대로 아닌 거죠.

 

하루하루가 새로웠어요. 전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그때부터 하나님하고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진짜 믿는 건지 아니면 믿는 척 하고 싶었던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뭘 모르는 종찬씨도 저를 졸졸 따라다니다 결국 교회까지 왔지만(그 사람 진짜 속물이거든요)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제가 역 앞에서 찬양하는 동안 뒤에서 불량한 친구들하고 담배나 피면서 ‘한라산 정기’ 어쩌구 떠들더라도 전 조금도 개의치 않았어요.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이렇게 행복한데, 그 사람이 원님 덕분에 나팔 좀 분다고 뭐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용서하기로 했죠. 그래, 우리 쭌이한테 그런 일이 생긴 것도,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긴 것도 다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이었을 테니까. 이제 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라면, 거꾸로 그걸 실천함으로써 나도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얻으리라. 면회 가서 그 인간을 봤을 때 전 너무나 뿌듯했어요. 아, 저기 나의 용서를 받고 새롭게 구원을 얻을 어린 양이 앉아 있구나. 이게 결국 하나님의 큰 뜻이었구나...

 

근데…근데 이런 씨발, 그게 아니었어요. 말이 돼요? 감방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그 놈의 말을, 드디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그 미친놈의 말을, 아침에 일어나 기도로 시작하고 자기 전에도 기도로 끝낸다는 그 인간 말종의 말을 제가 듣다니요!

어떻게 교도소를 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제가 잠깐 기절을 했었나 보죠? 하하하. 웃음밖에 안 나왔어요. 하나님이 날 배신하다니. 하하.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약국에 찾아가서 아저씨를 꼬셨어요. 순진한 분이라 그런지 쉽게 넘어오더라구요. 아저씨랑 억지로 섹스를 하면서 전 하나님한테 물었어요. ‘보여? 보여? 보이냐구?’ 당신이 그렇게 사랑한다던 그 어린 양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이냐구!

 

 약국 아저씨랑 헤어져서 카센터로 갔더니 종찬씨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더라고요. 오늘이 생일이었나 봐요. 아, 그래서 같이 저녁 먹자고 했었구나. 전 잔인하게 물었죠. ‘종찬씨도 하고 싶어요, 섹스? 혹시 원하나 해서.’ 미친년같이 노래를 부르는 제 앞에서 종찬씨는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가게를 뒤엎었죠.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였거든요. 하하. 신에게 복수하는 길은 신의 어린 양을 죽이는 길뿐이다. 그래 죽자! 잘 봐. 과도로 손목을 그은 것도 몰랐어요. 그냥 견딜 수가 없었나 봐요. 피가 철철 나데요. 근데 왜 살고 싶었을까요? 이 비참하고 치사한 목숨, 왜 놓기가 싫었을까요?

 

 정신병원에서 나온 저는 머리를 자르러 미장원에 갔다가 그 살인범의 딸을 만났어요. 이창동 감독님, 정말 지독한 사람이죠? 보통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면 그 사람도 좀 맛이 가는 법인데 이창동 감독님은 문화부 장관까지 하고 나서도 어떻게 변한 게 한 개도 없어요? 그 뭐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쓴 유홍준 씨도 얼마 전에 문화재 옆에서 고기를 구워먹다가 장난 아니게 욕 먹고 하던데 말이죠.

 

 머리를 자르다 말고 뛰쳐나온 저는 ‘니 미칬나, 머리를 한쪽만 자르다 나오게?’ 라고 말하는 양품점 아줌마 얘기를 듣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어요. 미친년한테 미친년이라구 물으니까 그것도 의외로 재밌더라구요.

 

 

죽는 건 좀 보류하기로 했어요. 그렇다고 뭐 딱히 살아갈 희망이 생긴 건 아니구요. 따뜻한 햇빛 아래서 머리를 듬성듬성 잘라버리고 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맨날 구박만 받으면서도 변함없이 제 주변을 얼쩡거리는 종찬씨가 어떤 땐 좀 고맙기도 하구요. 사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냐구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뭐.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애들 피아노 가르치고…가끔 종찬씨 좀 갈궈주고. 아, 근데 요즘은 씽크대 앞에 서서 혼자 밥 먹고 그러진 않아요. (2007.5.25)

 

 

 

Posted by 망망디
,

 

 

 

며칠 전 지하철 노원역 안에서 본 와이드칼라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그림이 보이는 원리를 이용해 만든 원자력병원 광고. ‘암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면 삶이 보입니다’ 라는 카피까지, 매체의 특성에 컨셉을 절묘하게 잘 엮은 아이디어죠? 

 

 

 

Posted by 망망디
,

 


<비오는 날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1 밀전병, 전, 두부김치 등을 떠올리지 않는다

 

2 돼지, 소, 닭 등 안주용 동물을 생각하지 않는다

 

3 짜장면, 오징어튀김 등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을 오후 3시쯤 배불리 먹는다

 

4 스마트폰을 열어 통장 잔고를 확인해보지 않는다

 

5 퇴폐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나 인생 뭐 있냐고 징징대는 소설가의 SNS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지 않는다

 

6 그 자식은, 그 년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따위의 오지랍을 부리지 않는다

 

7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를 듣지 않는다

 

8 라디오헤드의 ‘Creep’도 듣지 않는다

 

9 콜드플레이의 ‘Fix You’도 듣지 않는다

 

10 킹 크림슨의 ‘Epitaph’는 절대로 듣지 않는다

 

11 블랙사바스의 모든 곡을 듣지 않는다

 

12 [병원24시], [다큐멘터리 사랑] 등의 TV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13 동창회장에게 불참통보 메시지를 보낸다

 

14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는다

 

15 학점을 짜게 준 교수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는다

 

16 가스활명수 한 병만 마셔도 취하는 인간과 저녁 약속을 잡는다

 

17 국내 정치뉴스를 보지 않는다

 

18 화장실 물때 청소를 하지 않는다

 

19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지 않는다



20 일찍 잔다


 

 

 

 

 

'짧은 글 짧은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봇대  (0) 2013.07.29
새벽에 대한 오해  (0) 2013.07.27
심심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2) 2013.04.11
선운사 동백꽃  (0) 2013.03.18
월조회의 추억  (0) 2013.02.03
Posted by 망망디
,

 

 

 

[28일후]라는 영화가 있다. [트레인스포팅]을 만들었던 대니 보일 감독의 이 작품은 시민들의 자발적 도움을 얻어 찍었다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런던의 시가지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좀비 영화의 걸작이다. 나중에 [28주후]라는 속편도 나온 이 작품을 보면서 감탄했던 건 좀비 영화이면서도 인간의 ‘관계’에 대해 냉철하게 질문하는 그 철학적 깊이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같이 도주하던 가족이나 애인이라도 좀비에게 물리거나 그 체액이 눈이나 입으로 떨어지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2초 이내로 망설임 없이 죽여야 하는 딜레마가 등장한다. 이미 좀비로 변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이라면 바로 전까지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사람을 애도 기간도 없이 그 즉시 죽일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대중적인 장르영화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드문 경험이었다.

 


정유정의 [28]은 정식 병명도 지어질 틈 없이 그저 ‘빨간눈’이라고만 알려진 인수공통전염병이 도는 가상의 도시 ‘화양’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황극이다. 개와 사람만 걸리고 퍼지는 이 병은 전염되자마자 눈동자와 눈 주위가 빨간 색으로 변한 뒤 사흘을 넘기 전에 사망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질병이다. 치료약도, 대책도 없다.

 

만약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정부는,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나올까? 정유정은 그런 의문에서 소설의 얼개를 엮어나간다. 먼저 정부와 다른 도시 사람들은 이 지역을 봉쇄할 것이다. 그리고 화양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개들을 전염병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살육을 감행할 것이다. ‘미친개’ 또는 ‘병을 옮기는 짐승’이라는 말 앞에서 살처분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정당하게 들리는가.

 

작가는 구제역 파동 때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장면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TV에서 그 필름을 본적이 있다. 처음엔 수많은 돼지들이 트럭에서 비명을 지르며 커다란 구덩이로 쏟아지는 장면들이 너무 참혹해서 눈을 감았었는데, 잠시 후 그걸 찍던 VJ가 카메라 옆에서 엉엉엉 통곡을 하는 소리에 눈을 떴던 기억이 난다. 전달자로서 냉정을 유지해야 할 그녀의 울음소리는 뜻밖이었고, 순간 감정이입이 되었으며, 조금 후에 우리는 과연 돼지나 닭들을 이처럼 태연하게 살처분할 자격이 있는가? 이러다 죄받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소설은 수의사 서재형, 신문기자 김윤주, 119구조대장 한기준, 개를 살해하는 싸이코 박동해, 그리고 늑대개 링고의 시점을 번갈아 오가며 진행된다. 다인칭 시점은 외국 스릴러물에서도 자주 보는 것이지만 이처럼 개에게도 인격(?)을 부여한 것은 이 작품의 주제에도 부합하는 매우 탁월한 선택이요 플롯이었다.

 

 

정유정은 ‘정말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인가?’라는 명제를 주인공인 서재형에게 부여한 채 스피디한 문장들로 무간지옥에 갇힌 인간군상들을 거침없이 그려 나간다.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기로 유명한 작가답게 동영상처럼 그려지는 119구조대의 시스템 묘사나 인수공통전염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 그리고 너무도 생생한 응급실과 간호사들의 세계(간호사 출신인 정유정 작가는 학생시절에 간호학과를 다닐 때도 국문과 친구들의 과제를 대신 써주곤 했다고 한다)에 대한 디테일에 힘입어 소설 속 화양은 점점 실제 공간으로 변해 간다.


특히 정유정은 악인을 묘사할 때 힘이 넘친다. 이번 소설에서는 박동해라는 인물이 단연 돋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형이나 여동생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하고 급기야 아버지에게 창고에 갇힌 경험까지 갖고 있던 동해는 집에 있던 개 쿠키를 잔인하게 죽이려다 우연히 수의사 재형을 만나는 바람에 실패하고 군대로 끌려간 싸이코다. 그러나 군대 안에서 여러 마리의 개를 잔인하게 도륙함으로써 존재증명을 하다 쫓겨나 결국 엉뚱하게도 한기준이 대장으로 있는 소방서에 파견근무를 하게 된 문제적 인물이다.

 

보통 이 정도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면 클라이맥스까지 끌고 가서 주인공과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정유정은 이번 작품에서는 절대 악인 박동해를 너무 일찍 죽여버린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작가는 [28]이라는 소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적 상황들을 즐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통제된 공간 속에서 국가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군대는 어떻게 움직이며 사람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를 시뮬레이션하듯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통신은 어떻게 단절되며 언론이나 SNS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나아가 30년 전 광주와 지금의 이 상황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군인들이 개를 총으로 쏴죽이고 트럭으로 싣고 가 날카로운 창칼이 버티고 서 있는 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 넣는 장면들은 끔찍하다. 한기준의 부인이 어린 딸을 안고 분노한 개들에게 목이 물려 죽는 장면도 섬찟하다. 방독마스크 안으로 붉게 변해가던 동료들의 슬픈 눈두덩들은 또 어떤가. 그의 이번 소설이 너무 무섭고 잔인해서 읽기 싫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정유정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간결하게, 손에 잡힐 듯 글로 쓴다.

 

 

그리고 이 작가에게 ‘하드보일드’만 있는 건 아니다. 곳곳에 심드렁하고 무심한 농담 같은 문장들을 툭툭 던져놓는가 하면 자신의 예전 작품에 나오는 인물을 재미로 슬쩍 끼워 넣기도 한다(정신병원의 환자 김용).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라고 밝혔던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애정도 놓치지 않는다(챈들러 얘기로는, 술이 사랑과 같다던데요. 첫 키스는 마법 같고, 두 번째는 친밀하고, 세 번째는 지겹다). 그리고 애잔한 마음을 묘사할 땐 눈물을 감추지 못하게 하는 마력도 있다. 난 쿠키가 죽은 뒤 그 개에 대한 추억과 소회를 밝히는 174페이지부터 한 장 반까지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으며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등장’이라 여겨졌던 [7년의 밤] 이후 또 정유정이다. 난 그녀가 좋다. 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철저한 준비,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거침없이 버리고(자기가 쓴 걸 버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다시 쓰는 프로정신이 좋다. 글이 안 될 땐 어떻게 하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술 먹지. 혼자 술 먹고 울면서 벽에 머리를 쿵쿵 박는 거지.”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좋다. 더구나 이번 소설은 엔터테인먼트를 뛰어넘는 묵직한 울림까지 있다. 올 여름은 [28]을 읽은 친구들과 함께 시원하게 한 잔 했으면 좋겠다.

 

 

 


 

Posted by 망망디
,

명품가방

길위의 생각들 2013. 7. 8. 22:51

가방의 상표는 중요하지 않다.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가 진짜다. 그 안에 현자들이 쓴 수상록이 한 권 들어있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재밌는 소설책이나 면도칼처럼 예리한 시집 한 권이 들어있다면, 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의 단초를 메모한 종이조각이 한 장 들어있다면 비닐쌕이라도 명품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비싼 가죽가방이라도 그 안에 화장품, 핸드폰, 카드명세서, 피임기구 같은 잡동사니들만 가득차 있다면 그 가방은 '수고한 자신을 위해 스스로에게 선물한'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가방 안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 당신의 가방은, 당신이다.

 

 

 

(*오늘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나 페북에 올렸던 글. 그러나 페북에 올린 글은 흘러가기 십상이기에)  

Posted by 망망디
,

 

Advertising Agency: Wieden + Kennedy, London, UK

Executive Creative Directors: Tony Davidson, Kim Papworth

Creatives: Chris Lapham, Aaron McGurk

Producer: James Guy

Client services: Laura McGauran, Paulo Salomao

Production Company: Nexus

Directors: Smith & Foulkes

Executive Creative Director: Chris O Reilly

Producer: Tracey Cooper

Production Assistant: Fernanda Garcia Lopez

Director of Photography: Clive Norman

Editorial Company: Trim Editing

Editors: Paul Hardcastle and David Slade

VFX Company: Nexus Productions & Analog

 

오늘 친구 중 한 명이 페북에 올려줘서 알게 된 혼다의 기업PR "Hands"편입니다. 고정된 카메라 앵글에 맨손이 등장해 볼트를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등으로 바꿔가며 장난감 만지듯 마술을 부리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영상이네요. 그런데 혼다는 왜 이런 필름을 만들었을까요? 그냥 재밌으라고 만든 건 아니겠죠? 혼다 홈페이지나 유투브에 있는 설명을 읽어보니 지난 65년 간 혼다가 이룩해 온 여러 가지 기술력도 보여주고 미래 기술도 보여주려고 만든 광고라고 합니다.

 

기업PR인데도 아주 미니멀하게 접근했고, 혼다에게 어울릴만한 젊고 세련된 소비자들을 타겟으로 할 얘기 다 하고 있는 영악한 광고입니다. 마침 유투브에 스텝 프로파일이 있어서 함께 올려봅니다. (아, 중간에 자동차를 쥐어짜 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장면은 수소연료((전지))자동차 얘기랍니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배기구에서는 물이 나오게 된다는 원리라네요: 친구 노상범의 페친인 하채효라는 분의 댓글 설명을 참조했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

지하철 패션

혜자 2013. 7. 3. 16:38

 

 

오늘 아침 그녀의 지하철 패션.

팔뚝을 찍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으나...도대체 여름에 어떻게 팔을 안 찍습니까?

'혜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금  (0) 2014.01.19
동그랗게, 행복하게  (0) 2013.11.04
남편이 안티  (0) 2013.06.28
신부가 너무 웃는 거 아냐?  (0) 2013.06.19
베드씬  (0) 2013.06.14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