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저버리겠습니다"
"뭐든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다"
"되는 대로 살아보겠습니다"

"많이 노시기 바랍니다"
"심심한 일상 되십시오"


'과한 것보다는 살짝 부족한 게 낫다'는 어떤 소설가의 짧은 포스팅을 읽으면서 이번 추석엔 이런 덕담을 주고 받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해봤다. 물론 진짜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려면 정말 친하거나 정말 안 친하거나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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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과 레베카 솔닛의 저서 등등을 필두로 페미니즘 논쟁이 한참 달아 올랐을 때 나는 아내에게 '그 논쟁들이 이해는 되지만 저렇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건 좀 과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가 '밤에 혼자 택시를 타거나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가야 하는 여자들의 두려운 심정을 남자들은 모른다’라는 핀잔을 들었다. 맞는 말이다. 역사를 뜻하는 단어 ‘History’가 he+story, 즉 ‘그의 이야기’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남성 중심적 사고가 당연한 세상에서 살아온 내가 여자들의 근원적인 공포나 억울함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서 자꾸 공부하고 토론하고 해야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여배우’라는 단어는 좀 퇴행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일단 배우가 감독한 영화, 라는 선입견을 제거한 채 보기는 힘들었고 감독이 문소리라는 여성이지만 ‘여류 작가’라는 말이 사라졌듯이 배우면 배우지 앞에 꼭 젠더를 표시해야 한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이는 첫번째 단편 <여배우> 편을 보고 나면 이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떡끄떡 하게 된다.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나이 든 여배우로 산다는 게 얼마나 애매하고 힘든 일인지는 문소리가 친구들과 등산길에서 만난 천만 관객 감독과 그 동료들을 통해 뼈저리게, 질리도록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연기 잘 해서 탄 트로피들은 빛 좋은 개살구이고(야, 나 메릴 스트립 아냐) 현실은 젊고 이쁜 여배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라 문소리가 할 역할은 ‘성격 센 정육점 여자’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야, 나 이뻐 안 이뻐?’라고 매니저에게 묻는 장면이나 남편인 장준환 감독의 ‘그럼 술이라도 줄이세요’ 등의 빵 터지는 대사는 페친인 성수선 작가 담벼락에서 이미 읽어서 새로울 게 없었고 여배우 문소리의 고충도 짤막한 영화 소개 기사들을 읽어보면 그리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영화 내내 그런 투정과 신세한탄만 들입다 쏟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웬걸, 첫 단편 <여배우>를 지나 두 번째 <여배우는 오늘도>, 그리고 세 번째 <최고의 감독>으로 갈수록 영화의 시야는 넓어지고 시나리오의 유머와 공감대는 신랄하면서도 깊어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걸까. 이 영화는 문소리가 중앙대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만든 단편에 새로 만든 단편들을 더 붙여서 옴니버스로 구성한 독립영화다. 당연히 문소리라는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했으며 그가 매니저와 함께 타고 다니는 밴 안에서의 일상이 주를 이룬다. 등산길, 주점, 노래방, 일식집, 은행 등의 장소에서 여배우의 피곤한 일상들이 펼쳐지고 성병숙이 연기하는 엄마와의 실갱이나 요양원의 시어머니 같은 픽션들이 더해질 땐 살짝 스테레오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그 포텐이 터진다.

세 번째 작품 <최고의 감독>은 십사년 전에 문소리와 '햇빛 좋은 날’인가 하는 영화 한 편을 찍고 계속 방황하다가 갑자기 작고한 '이 감독님’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얘기다. 예전의 의리를 생각해서 잠깐 문상만 하고 오려던 문소리는 장례식장에서 “어이, 문 스타!”라고 비아냥거리는 옛 동료 배우와 마주치게 된다. 인기도 없고 늙고 비루한, 예전엔 문소리 좋다고 따라다닌 적도 있지만 결국엔 이혼 당한 채 지금 아무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해 문소리에게 주정을 해대는 남자. 서로 가치 돋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뒤늦게 도착해 대성통곡을 하는 신인배우 서연이와 함께 망자에 대한 엇갈린 평가와 예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싸우게 된다.

처음엔 누가 저렇게 연기를 잘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화제의 연극 [미국인 아버지]로 이름을 날린 배우 윤상화였다. 그리고 철없으면서도 속이 빤히 보이는 신인 역은 전여빈이라는 배우였다. 전여빈은 학교 선배인 문소리의 첫 단편 <여배우>를 보고 SNS에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뒤 ‘문소리 감독님, 저와 함께 작업해 주십시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마술처럼 세 번째 영화에 캐스팅이 돼서 마지막 단편을 같이 찍게 된 것이었다. 연기력 좋은 두 배우와 문소리의 케미에 마지막 불을 당기는 건 이 감독의 미망인으로 나오는 배우 이승연이다. “나가 주실래요?” 라는 대사가 순식간에 “나가라고, 이 썅년아!”로 변화되는 짧은 순간에 야무지게 전여빈의 머리채를 움켜쥐는 그의 연기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뛰어나서 보는 이들에게 대단한 쾌감을 제공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일본 만화 [음주가무 연구소]가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음주가무연구소 소장 겸 술주정뱅이인 나노미냐에요”라고 도도하게 시작하다가 결국엔 망가지고 마는 그 유쾌한 만화처럼 이 영화에서도 문소리는 걸핏하면 썬글라스를 챙겨 쓰고 연예인인 척 하지만 결국엔 찌질하고 불안한 민낯을 드러내곤 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례식장 시퀀스에서는 고슴도치처럼 싸우던 상대들이 함께 ‘화해의 맞담배’를 피운 후 새벽 묘지를 지나 이차를 가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다. 

따지고 보면 아둥바둥 살 일이 뭐 있나. 이 감독의 예술 세계도, 이 감독이 서연이와 잤는지 안 잤는지도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이 밤이 지나면 문소리는 또 한 명의 여배우로 살아갈 뿐이고, 그건 이 영화를 보는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영화는 묻고 있는 듯하다. 문소리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설픈 교훈보다는 공감과 유머를 던질 줄 아는 이 넉넉한 시선이 감독 문소리의 다음 영화를 기대하게 한다. 극장에서 보기 바란다. 짧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면 당신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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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광장시장 빈대떡집 '박가네' 앞에서 촬영하는 사진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린 적이 있었죠. 그 때 찍은 광고입니다. 사실은 저희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진행한 '국민통합 캠페인' 경쟁PT에 참가했습니다. 다행히 우리 회사가 낸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문재인 정부가 공식적으로 처음 집행하는 광고를 찍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구요.

'누군가 내게 어떤 나라에 살고 싶냐 물으면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나라라고 대답하겠습니다'라는 카피는 저희들의 바람이기도 해서 정말 진심을 다해 찍고 카피를 가다듬었습니다. 

기존의 정부광고보다는 일반 기업PR처럼 느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맨 처음 아이디어에 비하면 많이 두리뭉실해진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버전을 더 좋아하는데, 결국 위에 소개한 버전으로 온에어가 되었습니다. 
여기는 제 블로그니까, 제가 좋아하는 버전도 한 번 소개해 보겠습니다. 


[B안 카피] 

누군가 내게
어떤 나라에 살고 싶냐고 물으면

돈이 많은 나라보다
땅이 넓은 나라보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보다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나라,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 만큼
보람을 느끼고

원칙과 공정함이 지켜져

모두가 더불어
행복해지는 나라


여기는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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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한 여자가 뒤늦게 만나
살림을 합쳤다.

각자의 애인이나 옛 추억이야
당연히 정리를 했지만
책꽂이에는 아직도
과거의 편린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두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한 집에 사는 두 사람이
할 일이라 생각했다.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들을
먼저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 질씩 주었다.

시시한 추리소설이나
값싼 베스트셀러들은
그냥 버렸다.

그래도 책꽂이엔 이상하게 
책들이 많았다. 

어느날 저녁
거실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각자 가지고 있던 시집들만 모아 보았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정호승의 <새벽편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정호승의 <별들은 따뜻하다>
유하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황지우의 <어느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모두 두 권씩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당대에 화제가 되었거나
후대까지 스테디 셀러로
사랑을 받았던 시집들.

너무 흔하고 트렌디해서
살짝 민망하기까지 했던,
그러나 전생에 나누어 가졌던
깨진 거울조각처럼

이제 와서야 두 권이
제짝처럼 야하게 몸을 맞댄
그 시절의 공감대.

'2-1=1'

이 간단한 수식이
삶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2013년 9월의 어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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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Ov1GOB87zJA



태국은 광고 선진국입니다. 특히 유머나 과장광고에 탁월하죠. 태국 사람들이 원래 코미디나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태국 광고는 시치미 뚝 따고 들어가는 황당한 설정이 많습니다. 이번에 건강보조식품 PT를 준비하며 찾아봤던 'SURE'라는 다이어트 보조식품의 광고도 그렇습니다.

날씬한 여자가 몸매를 뽐내면서 '나는 걱정 없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알약 하나를 입에 넣습니다. 점프컷 되면 아까 여자가 삼켰던 태블릿이 지방도로 위에 떨어지고 박혁거세 탄생 설화처럼 그 안에서 교통경찰이 나옵니다. 그는 곧장 일어나 다가오는 화물차를 세웁니다. 운전면허증을 보자 하고 트렁크에 뭘 실었냐고도 묻습니다. 열어보니 지방 덩어리들입니다. 경찰은 어디서 온 거냐고 묻고 어디로 가냐고도 묻습니다. 운전자는 입에서 왔고 장까지 간다고 대답합니다. 둘이 얘기할 때 '입'과 '장'이라 쓰여있는 교통 표지판도 잠깐씩 비춰집니다.

운전자는 미쳤냐고 묻습니다. 내가 여기를 이십 년을 왔다갔다 했는데. 그러나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방 소지죄로 체포한다'라고까지 한 술 더 뜹니다. 곧 이어 오토바이에 기름을 싣고 허벅지로 가던 운전자도 제지를 당합니다. 그들은 내내 웃기는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도 전혀 웃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농담섞인 항의를 이어가던 두 운전자는 마지막에 "이거 광고죠?"라는 포스트모던한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4분 가까이 되는 광고지만 너무 재미 있어서 끝까지 다 보고 금방 다시 돌려보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눈만 뜨면 스토리텔링을 부르짖지만 한 번 작심하고 뻥을 치려면 이 정도는 느긋하게 쳐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PT 준비로 바쁜 아침이지만 부러운 마음에 잠깐 다시 틀어본 태국광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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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가 김용은 대만에서 신문사를 창간하고 평생 그 신문의 주필로 일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평생 독재와 싸우고 잘못된 사회문제에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사조영웅전], [의천도룡기] 등 그가 쓴 무협소설들은 -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나중에 그의 문학만을 연구하는 ‘김용학’이라는 장르까지 만들어졌지만 - 어디까지나 신문의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김용과 비슷한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스웨덴의 스티그 라르손이다.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냐 싶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스티그 라르손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엑스포’라는 언론사를 세우고 극우파나 파시스트, 인종주의자들과 평생 싸운 사람이었다. 항상 적들에게 살해 위협을 느끼며 사느라 여자친구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삼십 년 동거를 했다고 하는 그가 농담삼아 ‘노후 보장용’으로 구상한 게 ‘밀레니엄 시리즈’라 이름 붙은 사회파 추리소설들이다. 첫 번째 소설’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시작으로 10부작으로 구성되었지만 세 번째 소설까지 원고를 넘기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만다.


몇 년 전 읽은 첫 번째 소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 이어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를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다. 전작에서 이미 선보인 밀레니엄의 편집장 미카엘 블름크비스트와 보안업체 조사원인 천재 해커 리스벳 살란데르가 또다시 거친 운명을 헤쳐가며 활약한다. 이번에는 미성년자 성매매에 얽힌 추악한 진실을 파헤친다.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스웨덴 인구 중 삼분의 일쯤은 읽은 수퍼 베스트셀러라서 그런지 충격적인 소재 말고도 주인공들의 파격적인 언행과 폭력, 섹스, 이상 성격 등이 양념처럼 골고루 배어있다. 특히 아주 작고 가냘픈 체격에 불 같은 성격과 민첩함, 괴력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공 살란데르는 작가가 좋아하는 '말괄량이 삐삐’가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스웨덴에서는 당연히 영화로 만들어졌고 미국에서도 데이빗 핀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소설과 분위가 좀 다르지만 영화도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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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자발적 노동착취의 현장 - 은곡도마 체험교실>

우리집에 있는 도마 이름이 은곡도마다. 박달나무로 만든 고가의 제품. 아내가 은곡도마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나도 매일 그 도마 위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살고 있으니 아주 무관하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도마는 은곡 이규석 선생의 작품이라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인데, 목공예 예술작품만 만들고 지내던 분이 '도마 메이커'가 된 것은 순전히 그의 딸 소영 씨 덕분이었다. 열 살때부터 소리를 배워 해외 무대까지 발을 넓혀 공연을 다니던 소리꾼 소영 씨는 우연히 은곡도마 아이디어를 낸 이후로 아버지의 일을 도와 이 제품의 제작, 배급은 물론 홍보, 마케팅 등 온갖 궃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아내가 몇 주 전부터 '은곡도마 체험교실' 날짜를 잡고 멤버들을 모았다. 은곡 선생이 오래 전부터 한 번 꼭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혜숙과 그의 남편 표문송, 윤혜자와 그의 남편 편성준, 옆집 총각 서동현까지 갑자기 몽골 여행을 떠난 한 친구만 빼고 원래 같이 가려던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서울에서 소영 씨 부부와 네 살짜리 아들 희수도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목적지는 인제군 필레에 있는 은곡 선생의 작업장. 전날 동현은 반차를 내고 송명섭막걸리 등 술을 준비하는 성의를 보였다. 말이 도마 체험장이지 사실은 캠핑인 것이다. 우리는 작업장으로 가기 전 인제의 하나로마트와 그 앞 정육점에 가서 고기와 술을 더 샀다. 도마 작업은 우리가 가는 캠핑의 일부분일 뿐, 대부분의 일정은 마시고 노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드넓은 비닐하우스 안에는 도마 말고도 은곡 선생이 만든 작품들이 즐비했다. 달마대사가 있는가 하면 새가 있고 섹시한 여인의 모습이 있도 의자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도 있었다. 짓궃은 성기 모양도 있었다. 하나 같이 그 전에는 그냥 나무일 뿐이었는데 예술가의 눈에 띄는 바람에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경험을 한 피조물들이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소영 씨에게 작업 지시를 받았다. 평평하게 도마 모양으로 절단된 나무토막을 사포질을 해서 매끄럽게 만든 후 작업용 기름을 칠하고 잽싸게 천으로 기름을 닦아내는 과정을 세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그것도 한 번에 하는 게 아니라 몇 시간 정도 텀을 두고 해야하는 제법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다섯 명의 용병들이 검은색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서울에서 각자 가져 온 앞치마를 하고 작업대 앞에 서서 조를 나눠 작업에 임했다. 누구는 도마를 날라오고 누구는 기름칠을 하고, 옆에서 그걸 받아서 기름을 얼른 닦아내고 도마가 잘 마르도록 건조대에 수납하는 일을 정성껏 했다. 신선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하면서 구슬땀을 흘리는 건 다들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소영 씨가 우리 옆에 와서 이렇게 고급 인력들이 내려와 일을 해줘서 고맙다며 격려를 해줬다. 비닐하우스 바깥에서는 동네 사는 인부들이 모터로 그라인딩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은곡 선생이 작업용 나무들 중 안 쓰는 것들을 모아 숯불을 만들어 주셔서 고기를 구웠다. 먼저 소고기를 구웠다. 문송이 구웠는데 음식에 엄격한 동현이 육즙이 마를까봐 굉장히 긴장하는 얼굴로 고기를 지켜보다가 고기가 채 익기 전에 얼른 들고 상으로 와서 사람들에게 먹어보라고 권했다. 숯불에 구워서 그런지 더 맛이 좋았다. 돼지고기도 구웠다. 좋은 고기를 산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넉넉하게 사온 고기 사이로 오징어도 구워 '오삼불고기'를 만들어 먹었다. 송명섭막걸리를 비롯한 각종 막걸리와 처음처럼이 번개처럼 비워졌다. 아내가 작업장으로 배달을 부탁한 문어도 도착했다. 안주와 술이 넘친다.

소영 씨가 어느 정도 먹었으면 이제 저녁작업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다들 비닐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하고 작업대 앞으로 가서 도마에 기름을 칠하고 천으로 기름을 닦아내고 건조대에 조심스럽게 수납을 했다. 다리가 아팠다. 팔도 아팠다 소영 씨 말에 의하면 내일 아침에 손가락 끝이 굉장히 아플 것이란다. 처음 하는 사람들은 떨어뜨릴까봐긴장하느라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작업자들이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도대체 쉴 틈이 없었다. 도마 하나를 건조대에 수납하고 나면 기름을 닦아내야 할 도마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 화장실에도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었다. 아, 어쩌다 이런 덫에 빠져버린 것일까.

카피라이터 출신 광고인이 둘, 기획팀장 출신 광고인이 하나, 출판기획을 하고 있는 기획자 하나, 화장품 회사의 인테리어 팀장 하나. 이런 단순 작업을 하기엔 우리들위 학력이나 지위가 너무 높다는 자조적인 농담이 오고 간다. 그러면서도 칠 똑바로 해라, 기름 잘 닦아내라, 떨어뜨리지 마라 등등 서로를 감시하고 독려하는 데엔 게으름이 없다.

작업은 명목일 뿐, 사실은 놀러 가는 거라는 윤혜자 여사의 꼬임에 빠져 순진하게 따라 온 나머지 네 명은 원망하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지만 윤 여사는 '나도 피해자다' 라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우리가 작업하는 동안 은곡 선생의 이웃인 동네 어른들이 놀러와서 술을 마시고 소영 씨에게 소리를 시키고 한다. 소영 씨가 어른 접대차 하는 소리 '사철가'를 들으며 우리들은 열심히 사포질을 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겨우 겨우 도마들을 정리하고 다시 모여 술을 마셨다. 은곡 선생이 특별히 춘향가 한 대목을 들려 주셨는데 소영 씨가 북을 치고 은곡 선생이 소리를 하는 아주 멋진 무대였다. 소영 씨가 소리를 배울 때 아버지도 함께 소리를 배웠다는데 정말 솜씨가 대단했다. 타고난 예술가 집안이 아닐 수 없다. 가져간 텐트를 하우스 안 빈 공간에 쳤다. 몇 년만에 쳐보는 텐트를 어둠 속에서 치려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 텐트 여자 텐트로 나누어서 잤는데 밤새도록 빗소리가 들려왔다.

일요일 아침에 소변을 보려고 일어났다가 다들 주섬주섬 작업대에 모여 사포질을 시작했다. 웃음이 나왔다. 어느덧 작업에 중독이 된 모양이었다. 우리가 열심히 할수록 고품질의 도마가 만들어진다는 데 묘한 쾌감과 자부심이 따라왔다. 은곡선생이 오시더니 이번 자원자들은 작업 수준이 매우 높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우리는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작업도 잘 한다는 소영 씨의 뻔한 거짓말에 싱글벙글하며 또 열심히 사포질을 하고 기름칠을 하고 닦아냈다.

아침은 김치찌개와 쏘세지 볶음이었는데 은곡 선생이 한 냄비밥이 너무 맛있어서 다들 배가 튿어질 지경으로 먹고 비명을 질렀다.

오전 작업을 마무리하고 바로 옆에 있는 필레온천에 갔다. 규모는 작지만 프랑스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발견된 게르마늄 온천이란다. 물의 느낌이 굉장히 좋았고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즐기는 야외 온천탕의 느낌은 정말 좋았다.

온천에서 돌아와 소영 씨 남편 동현 씨가 부쳐주는 부침개에 막걸리를 또 마셨다. 쉬엄쉬엄하라는 소영 씨의 말이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달려가서 남은 도마들에 기름칠을 하고 바닥을 천으로 문질러 닦았다. 이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노예들이 된 느낌이었다.

스마트폰으로 교통정보를 검색해 보니 길이 막힌다 하니 저녁을 먹고 천천히 출발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어차피 길에서 시간을 버리느니 그렇게 하자고 모두들 찬성했다. 소영 씨는 모든 작업이 끝날 때쯤 한 가구 당 마음에 드는 도마를 한 개씩 주겠다며 고르라고 했다. 신이 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도마를 하나씩 골라 선물로 받았다.

토요일 새벽 여섯 시에 모여 일요일 저녁까지 꽉찬 시간을 보냈다. 다음에 또 한 번 놀러오기로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남편이 의사인 소영 씨는 서울에 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서울로 올라간다. 다 떠나고 나면 이 넓은 하우스엔 은곡 선생 한 사람만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은곡 선생도 딸 내외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비는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내린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서 집에 가서 눕고싶운 생각 뿐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겠지. 뭐, 날이 흐려서 해가 뜰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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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후두둑


살아가는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건만

날마다 노심초사 하느라
하루를 다 쓴다

방금 카톡으로 받은
오늘의 따끈한 근심거리

네, 알겠습니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일용할
사소한 거짓말을 담아내고 있는데
창밖에서 문득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후두둑 후두득
이 소리좀 들으라고

살아가는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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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은 오랫동안 ‘광주사태’라고 불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항쟁’이라는 명예를 회복했는데 아직도 '그건 불순세력의 폭동이었다'고 말하는 측이 있는가 하면 정치권에서는 518기념일에 광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바로 얼마 전까지 논란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그만큼 상흔이 짙은 역사적 사건이었고, 그 강도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참살극이었으며, 37년이 지난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비현실적인 드라마이기도 했다.

나는 518계엄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박정희가 믿었던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서울의 봄’ 소리가 흘러 나오는 것을 어깨 너머로 듣다가 몇 달 후 갑자기 MBC뉴스데스크에서 이득렬 앵커가 “지금 이 시각, 광화문에선 대학생들의 데모가 한창입니다”라는 오프닝 멘트를 들을 때도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철부지였다. 그래서 오히려 그 해에 존 레논이 암살당했고, 그래서 그의 유작 앨범 [Starting Over>를 라디오에서 매일 들었다든지 하는 건 잘 기억나도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정말 창피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워낙 쉬쉬하는 분위기라 나처럼 어린 놈은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사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518의 참상을 사진이나 필름으로 목격하고 뒤늦게 치를 떨어야 했다.

대학 1학년 5월 축제기간에 학생회관에서 틀어준 광주 관련 기록물들은 대부분 독일 방송국에서 온 것들이라 해서 약간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나는데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그 의문이 풀린 셈이다. 이 영화는 518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어떻게 화자를 설정할 것인가를 고민한 점이 가장 큰 성공 포인트라고 생각하는데, 독일인 기자와 함께 택시운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은 너무나도 적절한 선택이었다.

광주까지 태워다주면 십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얼떨결에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게 된 택시기사 만섭. 평범한 속물이었던 그가 뜻하지 않게 독일 기자 피터와 동행하면서 점점 변화하는 모습은 송강호라는 괴물 연기자의 대사와 눈빛을 통해 관객의 마음 속으로 그대로 들어간다. 아니, 평범한 택시운전사의 마음과 목소리였기에 관객들을 그대로 1980년 광주 현장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뒤덮었던 [군함도]의 흥행을 [택시운전사]가 꺾었다고 한다. 만약 거창한 역사의식이나 직업의식에 불타는 주인공이 열변을 토하는 영화였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아, 송강호. 어쩌면 저렇게 연기를 잘 할 수가 있을까. 저 평범한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까. 그러나 송강호의 위대함은 다른 곳에 있다. 사실 '연기만 잘 하는 기계'들은 많다. 케빈 코스트너처럼 자유롭고 진보적인 역할을 많이 했던 배우가 알고보면 굉장히 보수적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면에서 송강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선택하고 실천하는 몇 안 되는 셀럽이다. 비록 [변호인]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민주 투사요’ 하는 오버도 없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묵묵히 신념을 지켜내면서 예술적인 성과까지 이루어 내는 것. 이건 정말 어렵고 소중한 능력이다. 그래서 난 송강호라는 배우를 이 시대의 위대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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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이나 방송인 노홍철은 왜 책방을 냈을까. 아내나 친구들이 술을 마시면서 가끔 서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그들은 정말 책의 미래를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책을, 또는 책방을 이용해서 자신의 '퍼스널 브랜드'를 높이려는 것일까(물론 그러면서 책도 잘 팔리면 더 좋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좀 더 잘 살거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진리에 가깝다. 책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읽을 시간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우리는 먹고 사는 일에, 공부니 취직 준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이 생기면 TV에, 인터넷에, 모바일에 또 대부분의 시간을 빼앗긴다. 일이나 공부에 치여, 구직이나 스펙쌓기에 지쳐 널부러져 있다가 잠깐 정신이 나면 리모콘을 들어 '효리네 민박' 같은 프로그램을 틀어 건성으로 본다. 건성으로 보다가 효리가 요가를 하는 걸 보고 나도 요가나 배워볼까, 생각한다. 이상순이 다기에 뜨거운 차를 붓는 것을 보고는 나도 차를 시작해 볼까, 생각한다. 실제로 요가학원이 늘어나고 다기나 보이차가 잘 팔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 책이 끼어들 틈은 없다. 가끔 드라마나 <무한도전> 같은 인기 프로그램에 책이 한 권 노출되면 당장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투기 현장의 떳다방보다도 못한 '반짝 상품'일 뿐이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나도 회사 일이 바빠서 지지난 주에 산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출퇴근 시간과 잠자기 직전에 조금씩 읽었는데도 아직 2권 중간이다. 물론 출퇴근 시간에도 기습적으로 울리는 업무전화나 카톡 때문에 온전히 소설에 집중하기는 어렵다. 남들보다 조금은 더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이렇게 책을 읽기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한기호 소장의 칼럼 ' 대한민국에는 서점이 없다. 그러니 출판 경기가 최악일 수밖에 없다' 에서 보는 것처럼 작가들도 책을 팔아 생활할 수 없으니까 강연으로 돈을 번다. 사람들은 '세바시' 같은 강연엔 열광하며 박수를 치지만 그 강사가 얘기하는 책을 사서 읽진 않는다. 그러니 서점이 잘 될 리가 없다. 그리고 어쩌다가 서점에 가도 서점에서 제안하는 매대 위의 책을 사서 읽을 수밖에 없다. 


책의 유통 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책도 서점도 상품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말에도 동의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 본질적인 문제일까. 비꿔야 하는 것은 쓸 데 없이 분주하고 걱정만 하며 사는 우리의 삶이 아닐까. 정말 내가 옛날에 다니던 구파발 전철역 앞의 '진양서점'이나 맥 라이언이 책방 주인으로 나오던 <유브 갓 메일> 같은 정겹고 소소한 일상 속의 서점이란 불가능한 것일까. 이렇게 -까, 로 끝나는 의문문만 잔뜩 늘어놓고 끝내는 글을 쓰는 건 정말 싫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라고 뽀족한 수를 낼 수가 있을까. 아, 그런데 참. 그들은 왜 책방을 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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