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냐고 묻는 책 - 김현성의 <당신처럼 나도 외로워서> 



오래 전, 조영남이 TV 독서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이 쓴 새 책 <예수의 샅바를 잡다> 얘기를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여자 아나운서가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것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첫째는 섹스”라고 대답했고(아, 역시! 하고 아나운서가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두 번째는 공부” 라고 했다. 아, 공부라니. 천하의 ‘논다니’이자 스캔들 메이커인 조영남이 섹스를 좋아하는 거야 너무도 당연하지만 두 번째는 돈도 술도 권력도 음악도 아닌 공부라니. 


물론 나는 그때 조영남이 말한 공부가 도서관에 앉아 수험도서를 읽고 시험을 치루고 하는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리고 그것은 뮤지션 출신의 신예 작가 김현성이 쓴 첫 번째 감성에세이 <당신처럼 나도 외로워서>를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도대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리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공부를 해야하는 걸까. 



김현성의 책 <당신처럼 나도 외로워서>는 연애의 끝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작가는 누군가와의 헤어짐이 새로운 성찰을 위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뭘 하면서 살면 행복할까, 라는 인생고민을 풀기 위해서 여행을 결심한다. 여행. 그것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이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스스로를 객체로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가득 차고 있는데 가진 것은 텅 비어 간다’ 


여행을 떠나기 전 김현성이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 글이다. 이건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느끼게 되는 감성인데 문제는 그때 바로 과감하게 여행가방을 쌀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깨달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냥 생각만으로 그치면 그의 인생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결국 여행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작가가 여행자가 되기 위해 가방을 꾸리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알랭 드 보통이 가방에 대해 썼던 글과 철학자 장석주의 가방에 관한 글 들이 떠올랐다. 여행지로 떠나기 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 비로소 한 개의 가방이 꾸려졌을 때, 그게 한 사람 인생에 필요한 모든 물건의 최소부피라는 그들의 글을.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 하는 바람에 우연찮게 가수가 되었던 김현성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는 순간 인생이 달라졌다. 문학을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뭘 해야 행복한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뮤지션의 길을 버리고 한예종에 들어가 공부를 했고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 해명’이라는 어려운 강의를 들으며 예술과 철학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낚시 애호가가 낚시를 할 때 가장 편하고 행복해하는 것처럼 김현성은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만큼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행복을 계속 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태리와 파리 등 유럽 지역을 여행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에피소드들은 때로는 정갈한 문장들로, 때로는 유머 넘치는 표현으로 읽는 맛을 더해준다. 나는 특히 가리발디역에서 무임승차를 했던 잘생기고 가난한 호텔리어 줄리안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고, 피렌체공항에서 약속한 후배가 오지 않자 괜히 옆에 있는 사람들이 소매치기 집단이 아닐까 걱정하며 오해의 파장을 키워나가다가 결국 선량한 흑인남자를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던(마마, 난 이제 사람 죽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지쳤다고요. 이젠 정말 조용히 살고 싶어. 그런데 마마, 저 동양인 새끼가 자꾸 우릴 빤히 쳐다보는데, 가서 확 죽여버릴까요?)장면을 읽고 많이 웃었다. 그리고 에밀 졸라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파리는 물론 중세의 천재화가 조토의 벽화를 찾아나서는 책 말미의 이탈리아 여행 에피소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다만 인생이라는 단 한 번 주어진 여정을 걸어가면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여행이 될수 있을까 고민해본 과정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생각의 지도다. 나는 운좋게도 이 책의 초고를 먼저 읽어보는 행운을 누렸고 어쩌다보니 내가 제안했던 제목(원래는 ‘당신들처럼 나도 외로워서’였는데 작가의 최종 의견에 따라 ‘당신처럼’으로 바뀌었다)으로 책이 나오는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내가 지은 제목이라고 무조건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문장수업을 하고 생각의 결을 정련한 신예작가 김현성의 글들이 정말로 좋기 때문에 권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면서도 모두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는 요즘 사람들 틈에서 이 책을 펼쳐 읽는 당신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에서 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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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레이먼드 카버나 윤대녕의 소설을 지금 열 다섯살 중학생이 읽는다고 생각해 보자. 뭐,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들이니 읽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읽는 것이 아니다. 뜻도 모르고 그냥 눈으로 스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카버의 짧은 소설들이 우리 인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행위라는 것을, 여행만 떠나면 자살 직전일 것 같은 여자들을 만나 카페에서 술을 마시거나 여관에서 같이 자는 주인공의 여정이 인생의 쓸쓸함과 신산함을 돌려 말하는 글이라는 것을 열 다섯살 나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그런 존재다. '열 두살은 열 두살을 살고 열 여섯은 열 여섯을 살지’라는 김창완의 노래도 바로 그런 얘기일 테니까.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이 거의 없는데도 '미성년자 관람불가’가 된 것은 미성년이 봐서는 아무런 의미도 느낄 수 없고 재미도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판단과 배려 덕분이다.  에로나 포르노만 성인영화가 아니다.  진짜 성인영화란 이런 것이다. 어른들이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 그런 이데올로기. 


홍상수의 작품들을 즐겨 본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야기할 것이다. 또 그 얘기야? 그렇다 또 그 얘기다. 이번에도 영화감독이 주인공이고 그림을 그린다는 젊은 여자가 하나 나온다. 둘은 우연히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술에 취해 서로 약점을 드러내고 속내를 탐색하다가 치사하거나 어이 없는 공방전이 몇 차례 지나가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런 지리멸렬한 이야기로 감독은 이번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을 탔고 정재영은 남우주연상까지 탔다. 어떻게 그런 결과가 가능했을까. 


수원에 GV 및 특강이 있어서 내려 온 영화감독 함춘수는 주최측의 착오 때문에 하루 일찍 오는 바람에 행사 전날 숙소를 정해두고 하릴없이 화성행궁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후줄근한 청바지와 오리털 파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기보다는 돈 없고 시간은 많은 소외된 지식인의 모습에 가깝다. 고궁의 따뜻한 햇빛이 내려쬐는 툇마루에서 잠깐 졸던 춘수는 그곳에서 바나나우유를 마시고 있는 젊은 여자 희정을 목격한다. 뭐 하세요, 라고 거의 본능처럼 남자가 말을 붙이고 우유 마시는데요, 라고 여자가 대답을 하고. 어렵게 어렵게 말을 붙인 두 사람은 남자가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여자가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하면서 급반전을 이룬다.

커피를 마시러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작업실로 가게 되고 거기서 그녀의 그림을 본 남자는 “희정 씨는 모르고 들어가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하는 것 같아요”라는 애매모호로 칠갑을 한 칭찬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해가 지자 자연스럽게 스시집으로 가서 소주를 마신다. 원래는 치킨집에 갈 계획이었는데 춘수가 즉흥적으로 스시집 앞에 멈추는 바람에 희정이 그집으로 들어가자고 한 것이다. 

단 둘이 술을 마시며 남녀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남자는 계속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여자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애간장을 태운다. “아유, 제가 무슨…”이라는 입에 발린 지식인의 겸손을 몸에 두른 듯한 정재영의 연기도 그렇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인생의 맛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김민희의 자연스러운 목소리와 연기도 일품이다.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음주 장면은 모두 실제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배우들은 진짜 술을 마시고 그 술에 취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저 배우들은 술이 좀 약하네. 보통 홍상수 영화에는 테이블에 소주가 대여섯 병은 늘어서 있는데 아까 걔네들은 세 병밖에 없었잖아.”

그렇다. 세 병이든 다섯 병이든 중요한 건 배우들이 정말로 술을 마시며 연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건 대사를 정확하게 외우고 연기를 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훌쩍 넘어서는 연출법이며 연기 테크닉이다. 배우들은 그날 아침에야 감독이 쓰기 시작하는 시나리오를 받다들고 연기를 한다. 물론 그 전에 감독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이 영화가 어떤 컨셉과 얼개로 진행이 될 것이고 어떤 소재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건 알지만 1부와 2부가 어떻게 미세하게 다를 것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영화를 찍게 된다. 그건 감독도 닥쳐보기 전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천재의 자신감이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는 독단이요, 파격이다. 아무튼 이번엔 술이 약한 배우들이 술 영화를 찍느라고 고생을 좀 했겠다. 나중에 들었는데 정재영은 정말 스시집 장면을 찍고 나서 기절하듯 쓰러져 잤다고 한다.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희정이 깜빡 잊고 있었던 파티에 함께 가게 되고 거기서 최화정, 기주봉, 서영화 등을 만나게 되는데 이미 술이 많이 취했고 또 깐깐한 최화정에 의해 춘수가 일찍 결혼을 한 유부남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계에서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것이 모두 밝혀진다. 화가 난 희정은 다른 방으로 가서 책상에 업드려 자고 춘수는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채 숙소로 돌아간다. 다음날 GV때 사회자이자 평론가인 유준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춘수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마구 그 평론가를 욕하게 되고 마침 엉뚱하게 자신의 시집을 들고 찾아온 서영화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된다. 여기까지가 1부다.

2부는 똑같은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펼져친다. 이건 <오!수정>이나 <강원도의 힘>에서부터 계속 되던 '홍상수표' 전개방식이다. 그때는 정보석이 “포크예요”라고 하다가 “스푼이에요”라고 바뀐 것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후로 시간대를 마구 뒤섞어본다든지(<자유의 언덕>) 시점이 바뀌면서 드러나는 코미적인 상황들을 보여준다든지(<우리 선희>) 하는 변주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홍상수의 '반복과 차이’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전에는 그런 것을 통해 지식인의 위선, 남자들의 찌질함, 여자들의 빤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홍상수 영화가 재미 있지만 불편하다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홍상수는 더 여유로워지고 깊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 리뷰를 쓰려고 다시 살펴보니 제목의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왜 그런가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홍상수 감독 왈 ‘제목이 너무 길어서’ 였다고 한다. 제목의 의미를 찾아 헤맨 사람들에겐 다소 김이 빠지는 설명일 수 있겠다. 그런데 난 그게 이 영화를 이해하는 작은 팁이 될 수도 있다 싶었다. 

홍상수 영화가 세상의 찌질함, 남자들의 유치함을 연료로 삼고 있는 코미디 영화라는 점은 데뷔적부터 지금까지 여전하지만 그 걍팍함은 많이 사라졌다. 거짓말을 일삼는 춘수도 2부에서는 더 솔직해지고 희정도 그런 춘수를 탓하기는커녕 나중에 술에 취한 춘수가 선배 언니들 앞에서 팬티까지 내리는 추태를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도 오히려 귀엽게 여긴다. 거짓말을 하든 참말을 하든 애초부터 세상에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이건 1부와 2부가 사뭇 다르게 진행되지만 큰 그림으로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2부에서 둘이 즉흥적으로 택시를 타고 강원도로 놀러가기로 의기투합하지만 잠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 얘기가 흐지부지 되어 없었던 얘기처럼 취급되는 장면도 그렇다. 둘이 택시비로 십만 원을 내고 강원도까지 가든 안 가든 뭐 그리 달라질 일이 있겠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홍상수 영화는 절망도 희망도 없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런데 그 흘러감이 인위적이지 않고(우연을 질료로 삼는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쓴맛단맛을 아는 통찰력이 스며있기에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른한 술자리와 반복되는 헛소리들 속에서 우리들의 인생이 의외의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홍상수의 영화들은 흥행과 상관 없이 또 만들어질 것이고(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부터 전원사라는 영화사를 차려 자유롭게 영화를 찍고 있다)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도 또 다른 재미와 의미가 피어날 것이다. 또 어디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이번엔 수원이었지만 다음엔 제천일 수도 있고 부산일 수도 있다. 그게 어디면 어떻겠는가. 어디나 사람은 살아가고 있고 이야기는 만들어지는데. 우리 곁에 홍상수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그는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발명하는 발명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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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코끼리가 그려진 에버노트라는 앱을 본 적이 있는가. 기억력이 좋은 동물로 알려진 코끼리를 사용한 이 앱은 ‘모든 것을 기억하라( Remember Everything)’라는 모토처럼 세상의 모든 기억을 향상시키겠다는 비전을 갖고 태어난 기업이자 디바이스의 이름이기도 하다. 언제든지(Ever) 기록하고(Note) 자신만의 콘테츠를 언제까진(Ever) 저장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 혹은 컴퓨터에서만 쓸 수 있는 메모 어플리케이션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노트다. 


나도 에버노트 사용자다. 그런데 굉장히 초보적인 사용자다. 내가 에버노트로 하는 일이라고는 길을  가다가 또는 사무실에서 멍때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단어나 문장을 재빨리 기록하고 나중에 그걸 찾아 다시 새로운 글이나 아이디어로 발전시키는 것뿐이다. 때로는 신문 칼럼이나 인터넷 기사를 스크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거의 다다. 나는 하위 폴더들을 생성해 정보를 분류하지도 못하고 태그 기능으로 데이터를 검색하지도 못한다. 이 모든 게 무식하고 게을러서 그렇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번에 홍순성 소장이 쓴 에버노트 책의 제목 ‘프로들의 에버노트’라는 제목을 짓게 되었다. 홍 소장은 우리나라에서 에버노트에 가장 정통한 스마트 워킹 및 정보관리컨설턴트다. 나는 몇 년 전 아내의 추천으로 홍 소장이 진행하는 에버노트 유료강좌에 한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를 내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워낙 컴맹 수준인 나는 다름 참석자들이 다 이해하는 애버노트 기본 사용팁을 거의 숙지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스마트 워터가 아닌 나는 그저 메모만 하는 것으로도 에버노트 사용에 만족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로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 간간히 안부를 묻게 되었고 사람 좋아하고 또 사람들끼리 연결해 주기 좋아하는 홍 소장 덕에 나의 힘으로는 만나기 힘든 직종의 몇몇 전문가들과 몇 번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예전부터 인복이 많은 나의 행운 덕분이다.

얼마 전 홍 소장이 새로운 책의 이름을 공모한다는 글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렸다. 책 제목의 조건은 일단 짧을 것(두 단어면 좋겠다), 그리고 ‘일 잘하는 사람들의 에버노트’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을 것 등이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댓글로 책 제목 응모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냥 지나치기 싫어서 ‘프로들의 에버노트는 어떠세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며칠 후 홍 소장으로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일단 내가 응모한 ‘프로들의 에버노트’를 후보작으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종 결정 전까지 몇 가지만 더 아이디어를 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제목은 없을까, 조금 더 아이디얼한 것은 없을까 하는, 모든 저자들의 욕심이었다. 

마침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주말 동안 아이데이션을 좀 더 해서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홍 소장님, 책 제목 관련 메모입니다. 짧게 생각해보면 ‘프로들의 에버노트’ 정도가 제일 나은 거 같구요, 조금 더 긴 문장이 되도록 생각해 보면 ‘에버노트로 성공하기’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에버노트 습관’ 같은 패러디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Good job with Evernote’처럼 아예 영어를 쓰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봤고 ‘모든 것을 기억하라’같은 에버노트의 모토를 생각하면 ‘내가 만드는 보물창고, 에버노트’ 같은 의미 확장도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두 단어라는 제약 때문에 쉽지가 않더군요. 어쨌든 제가 생각한 것들은 이 정도입니다. 휴가 중인데 나름 바쁘네요.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책 제목이 ‘프로들의 에버노트’로 전해졌다는 소식이 왔다. 그리고 책 제목 때문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잘 팔려서 곧 2쇄를 찍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엉겁결에 지은 제목이 사람들에게 많이 전달된다니 반갑고 기쁘다. 그리고 들국화컴퍼니에서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다시 행진’이라는 들국화 콘서트 제목을 생각해 낸 나의 아내처럼 나도 ‘프로들의 에버노트’라는 제목을 지었다는 생각에 일말의 뿌듯함도 느껴졌다. 그저께 월향 이태원점에서 만난 홍 소장이 방금 출간된 ‘프로들의 에버노트’ 두 권을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셨다. 이왕 이렇게된 거, 책을 열심히 읽고 앞으로는 좀 더 프로처럼 일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내 티스토리 블로그 이름도 '편성준의 생각노트'다. 물론 이건 기타노 다케시가 펴낸 책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긴 하지만. 


(조금 전 샤워하다가 생각난 카피를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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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구경하다가 뒤늦게 좋은 칼럼을 읽고 공유합니다. 

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가 '황우석 사태'처럼 언젠가 있을 대박을 터뜨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주는 글이라서요.





[정동칼럼]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칠 의무

대학에 갓 입학한 ‘고등학교 4학년’들이 내 수업에서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들의 첫 질문은 과연 그것이 시험 범위에 들어가는지 여부이고, 내가 궁금한 점은 어떻게 모든 종류의 추천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이 책을 읽어본 학생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예의 바르게도 묻지 않는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게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

목적의식이 뚜렷한 세대이며 목적 없는 “쓸모없는 것들”을 가차 없이 퇴출시켜나간 교육시스템이다. 대학은 더 좋은 직장으로의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고, 고등학교는 더 좋은 대학으로의 입학을 준비하는 곳이며, 중학교는 더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고등학교로 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초등학교는, 그리고 유치원은…. 아니, 이 앞의 문장은 상식이 되어버려 새삼 지면에 옮기기도 뜬금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교육의 황폐화와 우리 현실의 암담함이 이런 목적론적 교육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문화의 시작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었고, 학술의 근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궁금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 교육에는 문화도 학술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것을 서생정신이라 불러도 좋고 아마추어리즘이라 불러도 좋다. 쓸모없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은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통해 아이폰을 만들 수 있었고, 워런 버핏이 ‘풍부한 독서’를 통해서 훌륭한 투자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학술과 교육과 문화는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기치 않게 페니실린이 발견되기도 할 것이며 우연찮게 뢴트겐은 X선에 손을 대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폰과 주식투자와 페니실린과 X선이 - “대박”이 - 학술과 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혹은 전해주고 싶은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이, 이 강의실이, 나아가 학교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당신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고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동굴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외우기 전에, 동굴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던 이가 동굴을 나와서 처음 광명한 햇살을 느꼈을 때의 그 저미는 고통을, 그리고 다시 동굴로 되돌아갔을 때의 뼈를 깎는 격통을 책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들은 이미 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시험에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살아가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면 다시는 읽어볼 수도, 고민해볼 수도, 토론해볼 수도 없을 마지막 기회라는 것. 나는 우리의 대학교와 고등학교와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학생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더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마지막 기회’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계절이 지나 겨울방학을 앞둔 시기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학생들이 또 있다. 취업의 어려운 관문을 뚫은 졸업예정자들인데, 축하의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기말고사를 치를 수 없다는 양해를 구한다. 학점을 받아야 졸업을 할 수 있지만 당장 회사에서 출근 - 무급인턴 - 을 하라고 하니 시험 대신 다른 것으로 학점을 달라는 부탁이다.

우리 교육시스템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위치한 ‘회사’들은 이토록 촌스럽기 짝이 없으며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 일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교정에서의 마지막 두어 달 기간에 당신들이 학생들을 얼마나 더 잘 성장시킬 자신이 있는지. 세상의 모든 관심과 배려를 받고 초·중·고·대학의 십수년 교육기간 동안의 학생 생활을 마감하는 이들을 두어 달 기다려줄 여유도 없는지. 사회적 배려라는 것이 수능일 아침 앰뷸런스로 고사장에 실어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 성장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이런 교육환경이 이르는 종착역은 바닥 모를 둔감함이다. 배려받지 못한 학생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시민으로 자라고, 손톱 밑의 가시가 아니면 고통과 분노는 건망증에 포획된다. 세월호, 국정원, 부패리스트, 메르스 등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공동체의 사건들이 너무도 쉽사리 잊혀지고, 일상의 아득함만 우리 앞에 벽처럼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아들 딸들에게 어떤 공동체를 물려줄 것인가.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근원적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안 없는 쓸모없는 글로 지면을 허비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이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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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기획한 조중걸 선생의 새 책 <러브온톨로지> 어떤 책일까 궁금해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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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의 기본은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가던 사람이 넘어진다거나 의자에 앉으려다가 의자가 뒤로 빠져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웃음이 터진다는 것이죠. 그건 광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려면 뭔가 예상에서 벗어나는 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될 수 없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언론계의 유명한 격언처럼 여자가 임신을 하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남자가 임신을 한 모습은 분명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겠죠. 


여기 남자 임산부가 나오는 광고가 있습니다. 'Fiber One'이라는 섬유질식품회사 광고입니다. '변비로 배가 부른 남자'라는 간단한 컨셉인데 남녀의 역할을 바꾼 상황 묘사와 연출이 치밀해서 퍽 재미있는 광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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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랑 얘기를 하다가 [멋진 하루]라는 영화를 둘 다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하정우와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죠. 당시 짤막한 리뷰를 쓴 기억이 나는데 어디 있나 한참을 찾다가 예전 싸이월드 미니홈피 '편성준의 음주일기'에서 찾았습니다. 그 분께 한 번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여기로 옮겨 봅니다. 날짜를 보니 2008년 10월 쓴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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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난다. 그런데 이 남자, 수단이 보통이 아니다. 음식점이든 술집이든 어딜 가나 주인들이랑 다 친하고 어딜가나 덤으로 뭔가를 더 받아 먹는다. 인간관계가 좋은 것이다. 여자는 생각한다. 그래, 이런 남자라면 인생을 맡겨도 무방하겠어.한참을 밀고 당기다 드디어 함께 여관으로 간다. 그런데 여관 주인 아줌마가 그 남자에게 반색을 하며 말한다. “오랜만이네? 근데 아가씬 왜 달고 왔어. 방값만 내면 내가 덤으로 하나 넣어줄 텐데.”

 


<멋진 하루>의 남자 주인공 조병운이 바로 이런 놈 아닐까. 허황되고 느물느물하고 말발 세고 그러면서도 또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만은 없는 페이소스를 가진 캐릭터. 이 영화는 어느 토요일 오전부터 밤까지 한나절 동안 일어나는 - 꿔준 돈 받으러 옛 애인 찾아 간 쩨쩨한 여자와 그 350만 원을 치사한 방법으로 갚으려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토요일 아침. 과천 경마장 로비에서 동창생들에게 경마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는 조병운에게 느닷없이 김희수가 나타난다. 일년 전에 헤어진 애인이다. 다짜고짜 “돈 갚어. 350만 원 꿔간 거.” 라고 앙칼지게 소리치는 그녀. 현금이 없다고 발뺌하는 병운에게 그녀는 오늘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돈을 받아가겠다고 버틴다.

 


그래서 ‘하룻동안 돌아다니며 350만 원 마련하기 투어’라는 짧은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병운은 희수를 데리고 아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찾아 다니거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까지 거의 삥을 뜯는수준으로 돈을 마련한다.

 

 

하정우는 정말 연기를 잘한다. 대사를 외운게 아니라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자기 대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투와 속도, 몸짓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밀양>에서 전도연의 열연 덕분에 송각호가 상대적으로 가려진 느낌이 든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전도연의 훌륭한 연기가 하정우의 포스에 의해 좀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업하는 사모님을 찾아가 골프 자세에 대한 정확한 조언을 하고(어머, 내 골프 강사도 그런 얘기 하던데!) 돈 백만 원을 받자마자 차용증을 내밀며(사모님, 제가 혈서를 쓰려고 했는데 빈혈이라…)너스레도 떤다. 술집 나가는 동생, 대학 서클 후배와 그 남편, 스키강사 시절의 후배들, 그리고 할리 데이비슨 타는 사촌 형.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 동창생까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많든 적든 돈을 얻어낸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병운의 부탁을 듣고 선뜻 돈을 꿔준다. 돈을 뜯어내려고 특별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희수는 어이가 없다. 왜 이러구 사냐. “너 그 아줌마랑 잤지?”  아니란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 함께 술을 마시게 된 서클 후배의 남편도 묻는다. “전에 우리 집사람하고 잤어요?” 아내가 술에 취해 병운이를 찾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상하다. 분명히 병운이는 믿을 수 없는날건달이 틀림없는데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사촌 형에게 찾아간 희수는 술에 취한 사촌형의 입을 통해 병운이가 ‘그 많던 조씨네 재산 다 말아먹고, 결국마누라까지 도망간 놈’ 이란 걸 알게 된다. 면전에서 그 정도 모욕을 당하면 화를 낼 만도 한데 병운이는 “뭐, 이미 다들 아는 얘긴데.”라고 싱글거리며 고기를 굽는다.

 

 

병운은 돈을 구하러 다니는 중간 다른 사람의 부탁도 이행해야 한다. 아는 형의 딸년이 학교를 안 가서 정학을 당했는데 학교에 가서 걔를 집까지 좀 데려다 달라는 것이다.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여자애를 데리고 나왔더니 그 사이 교문 앞에 세워둔 희수의 차가 견인을 당했다. 화가 치민다. 희수는 병운에게 지랄을 한다. 그러나 병운은 “차량보관소 여기서 안 멀어. 얘부터 데려다 주고 차 찾으러 가자.”라고 태연히 말한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문제아 여학생은 “병운이 삼촌처럼 어리광 심한 남자, 좀 곤란하죠. 그래두 전 병운이 삼촌 괜찮던데요?” 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한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 지하철을 타고 견인차량 보관소로가는 길은 쓸쓸하고 구질구질하다. 병운이 전철 안에서 효도르 선수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때 희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파마끼도 오래 전에 풀리고 단발로서도 어정쩡한 헤어스타일에 과하다싶은 마스카라를 칠한 채 그깟 350만 원을 받아내겠다고 옛 애인에게 하루 종일 끌려 다니는 자신의 옹졸한 모습을 문득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일년 동안 안 갚았다면서요?  그러게 왜 저렇게 헐렁한 놈한테 돈을 꿔줘요?”

 


낮에 만났던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생 싱글맘을 다시 만났더니 40만 원이 든 봉투를 내밀며 웃는다. 병운이는 차에 있는 휴대전화를 가지러 주차장에 갔다. 희수는 봉투를 다시 여자에게 내민다. “저 이 돈 못 받겠어요.” 여자와 희수는 서로 괜찮다고 한참을 옥신각신한다. “절대 안 물러나실 거죠?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20만 원씩 나눠요.” 결국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 330만 원을 돌려받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엉뚱하게 일본 애니메이션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이 자꾸 생각났다. 돌담, 신호등, 육교, 골목길 등 둘이 돌아다니는 동안 보여지는 서울 구석구석의 모습 때문이다. 새롭지만 낯설지않게, 서울을 이렇게 이쁘고 정감 있게 찍은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밤에 약속이 있다는 병운이 전철역에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내리자 희수는 작별을 고한다. 병운이가 차를 가리키며 손짓을 한다. 희수가 여자에게서 20만 원을 받는 동안 병운은 고장 났던 희수 차의 와이퍼를 고쳐놓은 것이다. 희수가 희미하게 웃는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그녀는 문득 병운이가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닿고 다시 전철역으로 간다.

 

할 일 없이 전철역에 들어갔다가 나온 병운은 역앞에서 판촉을 하고있는 건강음료 데스크에서 한가롭게 시음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내려서 뭘 할 것인가. 희수는 그냥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한다. 맨 처음 병운을 만났던 때가 자꾸 생각난다. 다시 한 번 작게 미소를 짓는다.

 

 

강파른 마음으로 찾아가서 빚을 받겠다고 온종일 끌려 다녔지만 마지막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채 돌아가게 된 희수. 쓸쓸한 위로랄까.일본 영화 <바이브레이터>의 마지막 장면처럼 뭔가 알싸하고 조금 더 착해진 느낌이 드는, 그런 엔딩이다. 집에 돌아와 영화일기를 쓰는 동안 캔맥주 하나를 따서 마셨다. 나에게도 오늘은 조금 괜찮은 하루였다고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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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좀 우스웠던 것 중 하나는 미스코리아나 수퍼모델 선발대회 같은 미인대회를 할 때마다 출연자나 사회자가 결론처럼(또는 기획의도처럼) ‘결국 내면의 아름다움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를 반복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수영복 심사일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아니,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면서 왜 영혼과 별 상관 없는 쭉쭉빵빵 몸매를 뽐내는 수영복 심사 때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것일까. 하긴 나도 아름다운 몸매가 좋긴 했다. 일단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에는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기 힘들 것 같았고 이쁜 여자와 못 생긴 여자 중 누가 더 착할 것 같냐고 물으면 왠지 이쁜 여자일 것만 같은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일수록 주인에게 더 사랑받는 이치나 들판에 핀 꽃 중에서도 예쁜 꽃들이 아이들에게 먼저 꺽이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진리처럼 보였다. 보기 드문 추남이었다던 소크라테스도 만약 헐리우드 배우인 브래드 피트나 데인젤 워싱턴처럼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쉽게 독배를 마시고 죽어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만 진지한 자리가 되어도 무조건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교조주의를 내게 강요했고 나도 자발적으로 그들의 거짓 정서에 굴복하는 일반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오늘 본 백감독의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제목 그대로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품고 있는 아이러니가 얼마나 큰가.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심한 부담감을 안고 들어가는 불리한 프로젝트였다. 사실은 백종열 감독이 장편상업영화 데뷔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했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었다. 지난 20여 년간 광고계나 뮤직비디오 업게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별 실패 없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백종열 감독이 왜 하필 인텔인사이드와 도시바가 만들어서 이미 '깐느광고영화제 그랑프리'라는 단물을 다 빼먹은 유명 콘텐츠에 도전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더구나 6부작으로 만들어진 기존의 광고영화는 ‘매일 밤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바뀐다’라는 빅 아이디어가 이미 알려질대로 다 알려지고 한글자막까지 나돌던 유투브의 인기 콘텐츠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예전 왕가위의 영화를 한 콤마 한 콤마 그대로 베껴 재기불능의 상태가 될때까지 욕을 먹었던 김의석 감독이나 히치콕의 [싸이코]를 컷바이컷으로 그대로 모사해 비웃음을 샀던  브라이언 드 팔머 꼴이 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그런 여러가지 구차한 걱정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극복해 버린 특이한 경우라고 해야할 것이다.  원작처럼 주인공 우진은 아침에 눈을 뜨면 나이, 성별, 인종에 이르기까지 먀번 전혀 다른 사람으로 깨어난다. 어떤 사람이 될지 ‘미리보기’ 따위는 존재하자 않는다. 그것은 ‘절대고독’을 전제로 하는 잔인한 운명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 것은 '관계를 이루는 존재’라는 점 때문인데 열여덟 살 이후로 우진에게 지속적인 관계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절친인 상백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진의 삶에 어느날 이수라는 여자가 들어온다.

영화는 마술적이고 동화적인 기본 설정답게 생활의 냄새는 최대한 지우고 두 사람의 로맨틱한  상황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따뜻하고 착한  아날로그적 분위기로 일관한다. 이는 무려 스물한 명에 달하는 우진 역의 남녀 배우들이 그들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매일밤 새로운 얼굴을 맞아야 하는 우진이라는 캐릭터에 충실하게 복무한 까닭이기도 하고 가구점이나 가구 디자이너라는 나무 질감이 많이 등장하는 인간적인 직업설정이나 공간, 소품배치 등에도 기인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훗날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뭔가 작고 흐뭇한 에피소드들이 자꾸만 생각난다면 그 공은 아마도 여주인공 이수 역을 맡은 한효주 덕분일 거라고 생각된다. 아름답지만 독하거나 격정적이지 않고, 스물아홉 살의 젊은 여자지만 마치 누나나 여동생처럼 나의 이야기를 찬찬히 잘 들어줄 것만 같은 여자. 이수는 그런 넉넘함을 표정과 제스추어에 탑재하고 있는 흔치 않는 캐릭터였다. 더구나 우진의 비밀을 알고 한참 사귀다가 너무 힘들어 헤어지려는 마음을 먹었을 떄(이수의 언니가 우진이 만들어준 의자에 앉아 “이건 너무 니 싸이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이수를 안아줄 때)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연기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물론 우진의 이야기를 아버지 세대로까지 확장시킨 후반부나 ‘내면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예쁘고 잘 생긴 주인공들 때문에 정신과 의사까지 동원해 틈만 나면 설교하듯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반복 강조하는 후반부는 좀 성기고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이건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설정에서부터 관객과 감독 배우 모두 서로 이해하고 들어가는 로맨틱 코미디 아닌가. 더구나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이 기본 아이디어가 모두 공개된 콘텐츠이기도 한데 뭐 더 새로운 것을 그렇게 바라나. 

이미 나이가 든 우리 커플은 초대형 팝콘 박스와 음료수컵을 든 젊은 커플들에 밀려 맨 오른쪽 자리로 피해가야만 했다(영화 보는 도중 옆에서 우적우적 팝콘 먹는 소리가 정말 싫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러 온 커플 중에 아직 손을 못 잡은 커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풀어져서 서로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맥주를 한 잔 걸치고 처음으로 같이 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는 그런 종류의 공감을 가진 작품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라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두 시간 동안 소소한 에피소드에 웃음짓거나 안타까워 하다가 결국 기분 좋은 추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영화. 그래서 친구들에게 추천하게 되고 비록 평론가들은 낮은 평점을 부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극장에 찾아가기 위해 시간을 비우는 영화. 원래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은 클라크 케이블이 나왔던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어젯밤에 생긴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늘 그런 이유로 사랑받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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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늦게 자전거를 타고 퇴근을 하다가 하마터면 횡단보도에서 피자배달 오토바이에 치일뻔 했습니다.잠깐이지만 아찔한 순간이었죠. 오토바이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 사람도 원래 나쁘거나 성질이 급한 사람은 아닐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무슨 아이디어가 희미하게 떠오르길래 얼른 아이폰에 녹음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아까 그 녹음을 다시 들으며 손가는대로 카피를 한 번 써봤습니다. 피자회사에서 이런 캠페인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뭐, 도미노피자든 피지헛이든 어디라도 상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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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그림을 그리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작가인 조덕현이 어느 날 인터넷에서 조덕현이란 이름을 발견한다. 영화배우 조덕현이다. 작가 조덕현은 배우 조덕현을 만나 가상인물 조덕현(1916~95)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 일제시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조덕현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960년대 한국 영화계도 전전하다가 결국 독거노인으로 쓸쓸하게 죽는 최후까지. 이야기 구성에는 소설가 김기창이 합류했다고 한다. 그걸 연극무대처럼 만들어 전시를 한다. 오늘 아침에 신문에서 읽었다. 이런 게 스토리텔링이지. 재밌을 거 같다. 10월 25일까지란다. 일민미술관. 보러가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2145275&code=9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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