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아리의 소설 <미인도>를 읽었다.

한 노인이 길에서 쓰러져 사망했는데 몸을 뒤져보니 대학생 학생증이 나왔고,지문을 감식해 보니 놀랍게도 그 학생 본인이 맞더라는, 신기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중편소설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신동으로 유명했던 전아리는 예전에 박웅현 ECD와 함께 <TV, 책을 말하다>에 출연한 적도 있는 젊은 작가인데 우리집에도 <즐거운 장난>이나 <시계탑> 같은 단편집이 있다.

동양화과 다니는 박성우라는 남자애가 우연한 기회에 아르바이트로 누군가의 별장을 지켜주러 갔다가 노골적인 춘화로 가득한 노인의 방에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어떤 섬이더라는 구운몽 같은 이야기다. '미인도'라 불리는 그 곳은 한복을 입고 옛말투를 쓰는 젊고 아름다운 미녀들로 그득한 섬이었는데, 여자들은 한결같이 새로 온 남자에게 관심을 표명하고 어떻게든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기운이 역력했다.

색정적인 기운이 넘쳐나는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어떤 남자든 누군가와 한 번 합방을 하면 그 순간 섬을 떠나야 하는 얄궃은 시스템이 문제였다. 그런데 웃기는 건 합방만 하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연애나 섹스가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인터코스'만을 피해 그 상황을 오래오래 즐기려는 야리꾸리한 상황들이 속출한다. 성우는 그 곳에서 누군가의 정사를 훔쳐보다가 그림 잘 그리는 게 탄로나는 바람에 섬 여인들에 의해 돌아가며 '주문제작 춘화'를 그리며 살게 되는데... 풋풋한 야설 같은 이 이야기는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의 스피디한 글쓰기에 힘입어 너울너울 단숨에 읽힌다. 한여름 납량특집극을 시청한 것 같은 알싸한 느낌의 스토리텔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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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있.는.사.람.” 

“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없어?” 

“반창코 있는 사람!” 

“반창고 내놔!” 

 

까진 뒤꿈치에 붙일 반창고를 찾는 여주인공의 새된 목소리를 싣고 스테디캠이 좁은 분장실 복도를 이리저리 누비는 첫 장면부터, 난 이 영화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중국 6세대 감독 중 대표주자인 지아장커의 <세계>를 몇 주 전 EBS에서 프리미어로 방영했다. 하지만 이 날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야근을 심하게 해야 하는 상황. 바쁜 카피를 대강 엉터리로 정리한 후  한상이가 옆에서 썸네일 스케치를 하는 동안 나는 밤 11시부터 TV속 영화에 코를 박고 떨어질 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일은 일이다. 한상이는 넋을 잃고 있는 나를 TV에서 떼어놓았고, 우리는 일요일에 출근을 안 하기 위해 TV를 끈 뒤 기를 쓰고 새벽 한시 반까지 일을 해야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영화를 못 봐 너무 아쉬워하는 나를 한상이가 안타깝고 한심하게 쳐다본다. 

 

일요일. 인터넷에 들어가보니 서울아트센터(구 허리우드극장)에서 <세계>를 상영 중이란다. 너무 반가워 망설일 틈도 없이 예매를 한 뒤 뿌듯한 마음으로 종로까지 달려간다. 

 

 

‘하룻동안에 세계일주를!’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커다랗게 걸려있는 베이징의 세계공원. 타오와 타이쉥은 여기서 무용수와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둘은 연인 사이다. 에펠탑, 런던브릿지, 피사의 사탑 등이 삼분의 일 사이즈로 오밀조밀 흩어져 있는 이 거짓말 같은 공간에서 타오는 춤을 추고 타이쉥은 관광객들을 돌본다. 타이쉥의 사촌동생 얼샤오도 여기서 일하는데 그 놈은 영 적응을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동료들과 함께 화려한 무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타오는 늘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사실 안을 들여다보면 마음은 춥고 불안하다. 매일 쳇바퀴처럼 도는 공원 생활이 그렇고 아직 몸을 허락하지 않은 남자친구 타이쉥이 떠나갈까봐 안절부절 하기도 한다. 

 

어느 날, 고향에서 잠깐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찾아왔을 때 셋은 같이 인사를 나누고 밥을 먹은 뒤 작별을 고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타오의 옛 남자친구를 배웅한 타이쉥은 그 날 둘이 함께 가곤 하던 초라한 여관에서 타오에게 사랑을 나누자고 조르다 또 거절당하자 ‘우리 애인 사이 맞아?’라며 화를 낸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여관이 너무 지저분해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알아, 우비를 입고 잤다고 했잖아.” 

“내 아이디어, 좋지 않았어?” 

 

측은한 마음에 더 이상 요구를 하지 못한 타이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타오를 말 없이 꼭 껴안아주는 것뿐이다. 

 

잠깐 다녀 올 일이 있어 고향에 가게 된 타이쉥은 함께 길동무를 하게 된 유부녀 췬과 가까워진다. 췬은 노름과 여자 문제로 늘 사고를 치는 남동생에게 또 돈을 가져다 주기 위해 타이쉥과 함께 길을 떠난 것이다. 십 년이나 남편과 떨어져 사는 외로운 여자 췬은 어느덧 타이쉥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감정을 그대로 밀어붙인다. 세계공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애인 타오가 눈에 밟히는 타이쉥도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비밀스런 관계를 갖게 된다. 

 

타이쉥이 없는 공원에서 일을 마치고 쓸쓸하게 걸어오던 타오는 동료 무용수 하나가 나이 든 공원 사장과 사진을 찍으며 데이트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두 사람은 절대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타오는 벤처사업으로 갑부가 된 젊은 남자에게 청혼을 받지만 거절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그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 안나를 만나게 된다. 함께 일할 땐 같은 무용수였지만 지금은 호스티스가 된 안나를 보고 타오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고향 친구와 후배를 베이징으로 잠깐 데려 온 타이쉥은 공원 여기저기를 안내하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다. 저건 런던브릿지, 저건 자유의 여신상, 저건 에펩탑이야. 모두 삼분의 일 사이즈로 제작됐지. 와, 에펠탑이랑 똑같이 생겼네. 진짜 에펠탑 가봤어? 아니… 고향 후배는 신이 나서 자기도 여기서 일할 수 없겠냐고 묻는다. 난감해진다. 어차피 가짜로 가득 찬 공원에서 혹시 자기 인생도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또 쓸쓸해진다. 

 

공원 생활에 잘 어울리지 못하던 사촌동생이 결국 팀원들의 물건을 훔치다 걸려 쫒겨난다. 심란한 마음에 타오와 함께 자기 고향으로 내려간 타이쉥은 전에 친구와 놀러 왔던 고향 후배가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죽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가 죽기 직전에 유서로 내민 쪽지엔 누구누구에게 꾼 돈과 어느어느 가게에 진 외상값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산업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고향은 더 이상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흙먼지 섞인 바람이 황량하게 두 사람 사이를 훓고 지나간다. 

 

어느 날 공원 사장이 회의를 소집해 모두를 불러모으더니 예전 팀장을 해임하고 젊은 여자 무용수를 팀장으로 임명한다고 전격 선언한다. 새 팀장은 예전에 타오가 사장과 데이트하는 현장을 목격했던 바로 그 친구다. 

화려했던 불빛이 모두 꺼진 시간, 숙소로 돌아가다 그 친구와 마주친 타오는 팀장 된 걸 축하한다고 약간 비아냥거리지만 ‘그냥 직함만 달라진 것뿐인데 뭘.’ 이라고 하는 친구의 허탈한 대답에서 타인의 고단한 삶과 마주친 걸 깨닫고 당황한다. 

 

여주인공을 연기한 자오타오는 실제로 세계공원에서 무용수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지아장커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탄 영화 <스틸라이프>에서도 주인공을 맡았다. 남자 주인공인 첸타이쉥도 베이징에서 연기과를 전공했지만 배우의 길이 막연해 ‘평생 불법DVD나 팔고 살아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인물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둘의 모습에서는 연기 이상의 깊이와 사실감이 절절이 묻어난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어요.” 

 

남자친구의 의처증 때문에 맨날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또 다른 공원 커플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던 날, 피로연장에서 즐겁게 건배를 하던 타오는 우연히 췬이 파리로 떠나면서 타이쉥에게 보내온 문자메시지를 보게 된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잠자리까지 가진 타이쉥이 자신을 배신을 한 것이다. 

 

숙소를 뛰쳐나온 타오는 돈을 아끼기 위해 값싼 여관으로 간다. 지저분한 여관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침대에 몸을 눕이는 타오. 우비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단추를 꼭꼭 여민 타오의 모습은 마치 누에고치 같다. 

 

몇날 며칠 타오를 찾아 헤메던 타이쉥은 결국 신혼여행 떠난 동료의 빈 숙소에서 타오를 발견한다. 문을 열어주지 않고 바닥에 앉아 타이쉥에게 욕을 해대는 타오와 문 밖에서 용서를 구하는 타이쉥. 

 

어느덧 날이 밝아 새벽이 되었고, 숙소에선 사람들의 요란한 비명과 고함이 다급한 발걸음과 뒤섞인다. 연탄 까스를 마신 사람이 있으니 빨리 119를 부르라는 소리와 함께 업혀 나온 남녀는 술을 마시고 잠들었던 타오와 타이쉥이다. 119는 아직 오지 않고 담요에 싸여 새벽 길바닥에 눕혀진 두 연인의 모습 위로 타오와 타이쉥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된다. 

 

“타이쉥, 우리 죽은 거야?”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마지막 대사는 왠지 낯이 익다. 아,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리턴>에서도 맨 끝에 이런 대사가 나오지.(형, 우린 끝난 건가요?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한 영화 기자는 <세계>를 보고 나서 ‘어떤 감독은 삼십대 중반에도 거장이 된다’ 라고 했다. 귀엽고 경쾌했던 <키즈리턴>에 비해 <세계>는 훨씬 남루하고 고통스러운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좋다. 정말 가슴이 뻐근해진다.     2006.11.22 17:44

 


* 오늘 페이스북 댓글로 어떤 페친께서 지아장커의 <산하고인>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예전에 그의 영화 중 가장 좋아했던 <세계>의 영화일기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10년 전이군요. 다시 보고싶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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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zq0fMT-hrbo


2001년도에 버드와이저는 수퍼볼 광고에 개구리가 '버드와이저'라고 우는 광고를 내보냈다. 그런데 그 다음해 수퍼볼 때 버드와이저 측은 지난번 광고가 효과가 별로였다며 중단해야겠다고 통보했다. 광고대행사인 Goodby & Silverstein Partners는 광고를 중단할 게 아니라 개구리를 없애자고 제안했다. 다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했지만 버드와이저 회장인 어거스트 부시 3세가 찬성했다. "재미있네. 난 도마뱀이 좋아." 


그래서 가게에 걸려있던 버드와이저 네온싸인이 기울어져 떨어지는 걸 구경하던 도마뱀들이 "프랭크, 개구리는 개굴개굴 우는 거야" 라고 말하자 "에이, 재미없다", "난 우울할 때 웃어. 히히히"하는 싱거운 광고가 나왔다. 그게 다다. 맥주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상관 없다. 다만 그 광고를 그 시간대에 같이 봤다는 공감대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광고를 보고 웃은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는 느낌만 주면 되는 것이다. 미친 소리 같지만. 맥주는 그런 소속감을 주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고. 




넷플릭스를 통해 보고 있는 다큐멘터리 <Art & Copy> 중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2009년도 선댄스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란다. 그 옛날 DDB를 만들었던 William Bernbach은 물론 TBWA/Chiat/Day나 Wieden+Kennedy 같은 대행사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내가 전에 소개했던 책 [겁나게 중요한 충고(Damn Good Advice)]를 썼던 빅 아이디어의 창시자 크리에이터 조지 로이스(George Lois) 할아버지도 나온다. 광고하는 분들은 시간 있을 때 이 영화 한 번 찾아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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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를 보고 아내가 많이 울었다. 극장을 나와 얼굴이 빨개진 아내에게 왜 울었냐고 물었더니 챙피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무엇이 챙피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부끄러웠으니까. 우리보다 훨씬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미래가 아닌 더 큰 가치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일차적으로 부끄러웠고 우리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도 더 어른 같았던 선배들의 언행에 이차적으로 부끄러웠다. 지금처럼 시험에 나오는 지식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가르치고 배우던 시대라 그런 '인간의 품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는 어렴풋이 알지만 독립운동가 송몽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살았던 우리들의 얕은 역사 지식에 또 한 번 부끄러워졌다. 마치 영화 <암살> 덕분에 뒤늦게야 천만 명의 한국인이 김원봉이라는 거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처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중학교 땐가 무슨 상을 받으면서 같이 받은 시집이었다. 그 후로 계속 이 시집을 끼고 살았던 것 같다. 몇 년째 나의 카카오톡 메신저 대화명이 하늘을 우러러 여러 점인 것만 봐도 윤동주의 시가 나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윤동주의 시는 그저 막연히 아름다웠으며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글에서 늘 청년의 냄새가 났을 뿐, 그 시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씌여졌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영화 <동주>를 만들기로 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얼마 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참 감동적인 씨나리오를 썼다 생각하고 찾아보니 극본을 쓴 신연식은 <러시안 소설>이라는 영화를 만든 감독인데 그가 먼저 씨나리오를 써서 이준익 감독에게 보여주었고 이후 둘이 같이 각본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억 원이 넘는 흥행작을 주로 만들던 감독이 순제작비 5억 원짜리 흑백영화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험이었을 것이지만 이준익은 거기서 흥행의 부담감을 덜어낸 자유를 느꼈던 것이리라. 대신 이준익은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과정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적은 예산이지만 70년 전에 살았던 젊은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혈기는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펄펄 살아날 수도 있고 그냥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감독과 제작자의 간절한 마음이 통해서 그랬는지 영화는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찬란하게 빛이 난다. 북간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윤동주와 송몽규는 사촌형제다. 둘 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편인데 내성적이고 섬세한 동주에 비해 몽규는  행동주의자적인 면모를 지녔다. 당연히 몽규가 앞장서고 동주가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장난처럼 투고한 글이 동아일보 꽁트 부문에 당선되는 것도 몽규가 먼저다. 늘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동주는 뭐든 결심하면 곧바로 몸을 던지는 몽규가 부럽다. 몽규는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잡을 테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격과 성향이 달랐을 뿐 뜨거운 심장을 가진 것은 똑같았기에 결국 둘은 같은 감옥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을 얘기하면서 배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우선 유아인을 제치고 동주 역을 맡게 된 강하늘(시나리오를 읽어본 유아인이 동주 역을 매우 탐냈으나 너는 너무 스타라서 안 된다며 감독이 거절했다는 얘기를 아내에게서 들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윤동주의 파리한 얼굴은 물론 원고지에 세로로 써내려가는 펜글씨까지도 윤동주의 필체를 닮았다. 이준익 감독도 영화를 찍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지금 윤동주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윤동주가 된 사람. 이는 강하늘만이 아니다. 배우들 뿐 아니라 전 스태프가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윤동주평전을 읽었다고 하니 과정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자는 감독의 다짐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영화의 제목이 ‘동주’지만 사실은 ‘몽규’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의 연기는 대단하다. 특히 마지막 부분 취조장면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엄청나다. 박정민은 지치고 아픈 연기를 하기 위해 촬영 전날부터 물과 밥을 안 먹고 버텼으며 연기에 너무 몰입하느라 안압이 올라 실핏줄이 터지는 바람에 촬영을 중단하고 병원에 실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감옥 창살 사이로 별을 헤아리며 동주의 목소리로 '별 헤는 밤'이 흘러 나올 때부터 아내는 울었지만 영화에서 가장 슬프고 아팠던 부분은 일본 경찰이 동주와 몽규에게 각각의 죄상을 적은 서류를 주고 서명을 요구하는 장면이었다. 동주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 지장을 찍으면 될 것 아니냐며 서명을 거부하고 몽규는 거기에 적힌대로 내가 다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울부짖으며 서명을 한다. '우리는 문명국이라서 절차를 지키는 것이라는 일제의 궤변 앞에서 목숨을 걸고 서명을 거부하는 젊은이도 불쌍하고 눈물을 뿌리며 서명을 감행하는 젊은이도 불쌍하다. 객석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진다. 

면회 장면에서 동주의 죽음을 알리는 몽규의 비참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동주와 몽규가 살아서 지금 엉망이 된 우리나라를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다행히 영민한 배우들이 있어서 조금 위안이 되긴 한다. 연기를 잘 하던 배우 박정민은 글도 잘 쓰는 모양이다. <톱클래스>라는 월간지에 매달 칼럼을 연재한다고 한다. 그가 쓴 글 <동주>를 덧붙인다. ‘언희(言喜)’는 말로써 기쁨을 준다는 그의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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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가 활발해지면서 타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며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남들의 삶에 별 관심이 없다. 그저 관심 있는 척 할 뿐이다. 나부터 그렇다.그래서 멀쩡해 보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을 하거나 이혼을 하거나 의절을 하면 그때서야 아, 그런 일이 있었어? 라고 놀라는 척하고는 이내 또 자신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러니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더라도 걔는 잘 살고 있어, 또는 걔 밥은 먹어, 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진 말자. 누구나 사는 건 쉽지 않으니까. 멀쩡해 보인다고 다 멀쩡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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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갔던 시립현대미술관. 

그러고보니 남들이 생선전 부칠 때 우린 큐브릭전을 부치고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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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카피 고민을 할 때면 별 게 다 신경이 쓰인다. 필기구도 그 중 하나. 연필로 썼다가 볼펜으로 썼다가 괜히 만년필로 바꿨다가. 아내가 쓰던 몽블랑 볼펜도 있고 파버카스텔 만년필, 일본 츠타야서점에서 산 빠이롯트 만년필, 노란 파버카스텔 연필, 이마트에서 산 일본 우노4색볼펜, 그리고 얼마 전 교보에 갔다가 괜히 심을 구입한 워터맨 볼펜까지. 그런다고 잘 써지는 것도 아닌데. 책상 위 연필꽂이를 바라보니 실로 많은 펜들이 꽂혀 있다. 결국 자판으로 정리할 거면서도 이렇게 많은 펜들이 필요하다니. 나중에 죽어 염라대왕 앞에서 대질심문 할 때도 생각이 안 나 못썼지 필기구 없어서 못썼다는 말은 못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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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12117265&code=990303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반대말은 다품종 소량생산이 아니라 공유경제와 공유소비가 되었다는 글쓴이의 통찰, 경청할 만한 시론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해야 할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다만 집도 자동차도 책도 남의 것을 빌려 쓰거나 함께 쓰는 게 익숙치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다 따로따로 구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 칼럼을 읽으면서 공유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의외로 쉬운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나의 삶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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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시를 쓰기로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어느날 한 기자가 그의 어려운 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시 하나를 가리키며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시를 썼느냐고 묻자 ‘이 시를 쓸 때는 나와 신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로지 신만이 아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신도 무슨 뜻인지 까먹었다는 얘기다. 시계태엽오렌지라는 제목을 단 소설가 앤서니 버지스도 죽기 전까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시계태엽오렌지(A Clockwork Orange)는 대학 시절 '비짜 비디오'로 처름 본 이래 DVD로, 시네마테크에서, 그리고 또 얼마 전 '스탠리 큐브릭전'에서도 반복해서 보았던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 전편을 이토록 몰입된 환경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오늘 오후 2시, 전날의 격한 음주로 인한 숙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매를 강행한 나는 압구정CGC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와 정식으로 조우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져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버지스는 1972년 한 잡지와 인터뷰하며 “런던 동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괴상한’(as queer as a clockwork orange)이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밝혔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레이어 ‘orang’을 이용한 말장난이라고 말했다. 또 얼마 뒤 그는 이 제목이 “즙이 많고 달콤하며 향이 좋은 한 유기적 독립체가 기계장치로 바뀌는 것”에 대한 은유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언어유희에서 시작했든 은유효과를 노렸든 아무래도 버지스는 남들이 안 쓰는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는 데 매혹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서 새로운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기 싫어했던 스탠리 큐브릭도 당연히 이 단어의 특별함에 단박에 매혹된 것이리라. 

1972년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매우 연극적이고 감각적인 미장센을 고집하는 이 영화는 미술은 말 할 것도 없고 특히 음악의 배치와 쓰임새가 놀랍다.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세련된 중산층 작가의 부인을 강간하는 장면은 너무도 매혹적으로 그려져 영국에서 청소년들이 이를 그대로 따라한 모방범죄가 발생했을 정도라고 한다. 덕분에 이 영화는 감독이 사망할 때까지 영국에서는 더 이상 상영을 하지 못했고. 

틴토 브라스 감독의 지상 최대 포르노 <칼리큘라>에서 네로 역을 맡았을 때도 굉장했는데 말콤 맥도웰은 이 영화에서 완전 미친놈 그 자체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얼굴을 쇠막대로 내려칠 것만 같은 위악적이고 불안한 미소와 눈빛. 도대체 이십대에 이런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가 몇이나 있었던가.

그리고 얼마 전 스탠리 큐브릭전에 다녀온 뒤 남긴 짧은 포스팅에 내 친구 표문송 씨가 큐브릭 예술의 핵심은 음악!!이라는 댓글을 달았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폭력장면들에 우아하게 흐르는 클래식이라니. 그것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그런데도 마치 그 장면을 위해 작곡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신선함이라니. 완벽주의자이자 천재였던 스탠리 큐브릭의 공력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영화의 이미지와 테크닉에 압도당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새삼 거론하는 게 구차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재의 작품에 뭐 이런저런 토를 달겠는가. 그냥 감탄하다 잠드는 것도 행복한 리뷰의 한 가지 방법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고 인터넷에서 찾은 평론가 김효선의 글을 많이 참조해서 썼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3101&cid=42621&categoryId=44430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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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곁에 있어도 나는 외롭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니까. 그래서 나는 '아내가 곁에 있어도 외로운' 게 아니라 외로운 와중에 아내가 곁에 있기에 그나마 견디고 산다는 것을 안다. 

* 몇 년 전에 페이스북에 쓴 글과 사진인데 어제 어떤 분이 담벼락에 새삼 '좋아요'를 누르시는 바람에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뚜라미 후배 윤효정의 남편인 조태석 씨가 찍어주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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