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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고 한 편을 보고 [SK이노베이션]이란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겠죠. 그러나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회사인지는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한 사람들의 고민은 계속됩니다. 전엔 '이노베이션'이란 단어의 뜻을 살려 '대한민국에 필요한 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이라고  살리더니 이번에 'SK'에 알파벳을 하나 더 붙여 'ASK'라는 가치를 찾아냈습니다. 사실 'SK'와 'Ask'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크리에이티브는 그런 것이라죠. 서로 상관 없는 점들을 이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 스티브 잡스도 비슷한 소릴 한 거 같은데요. 아무튼 모든 크리에이티브는 콜럼버스의 달걀입니다. 남이 해놓은 거 보면 쉬워 보이는데 막상 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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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 그게, 다 희망사항대로 돠는 경우는 없잖아요?

 

곽수종 : 제가 말씀드린 것은 말씀하신대로 다 희망사항이구요.

            요새 뭐, 맛있는 복집이 행복복집이고 맛있는 전집이 패자부활전집이라면서요?

            그래서 드렸던 말씀입니다...

 

오늘 점심 먹으면서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팟캐스트로 다시 듣고 있는데 '오감경제'라는 코너에서 우리 경제 전망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던 진행자 손석희 교수와 칼럼니스트 곽수종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맛있는 국민행복집, 패자부활전집" 얘기를 하더군요.

 

비록 끝까지 제작에 참여하지는 못하고 회사를 나오긴 했지만 제가 '패자부활전이란 이름의 전집' 아이디어를 냈고, 또 운 좋게 그 안이 경쟁PT에서 뽑혀  공익광고로 전파를 타게 된 이후 이렇게 다른 매체에서까지 언급되는 것을 들으니 기분이 참 좋더군요.^^ 역시 광고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최고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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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이 좀 있습니다. 구파발에 있던, 지금은 은평뉴타운으로 더 유명한 그 동네의 신도초등학교 49회 졸업생들입니다. 근처에 있던 예일같은 사립학교는 물론 갈현이나 연신, 불광초등학교에 비해서도 생활수준이 좀 떨어지고 인구 수는 되게 많은, 한 마디로 좀 못사는 동네에 있던 초등학교였죠. 그러나 역사만큼은 매우 길어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몇 대에 걸쳐 집안 친척 동문을 생산하고 있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걔네들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친했냐 하면, 그렇진 않습니다. 더구나 전 이 학교보다 더 깡촌에 있던 '백마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고 5학년 시작하면서 겨우 옮겨온 '전학생'이었으니까요. 아무튼 한 십 년 전 갑자기 신도초등학교 동창회가 결성되었다고 연락이 오는 바람에 새삼 이렇게 모이게 된 거죠. '아이러브스쿨'이 전국을 뒤흔들 때도 잠잠하던 애들이 어째서 늦바람이 났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한 번 정모를 해도 참 화끈하게 합니다. 주로 사는 동네는 연신내 근처지만 모이는 건 일영 송추 지나 그랜드유원지라는 물이 흐르는 야외 캠프입니다. 성수동에 사는 저는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가야 하는 곳이었죠.

 

 

전날 과음을 한 저는 일요일이라고 늦장을 부리다가  지하철을 타려고 성수역으로 나갔습니다

가다 보니 호떡이 뒤집어져 있더군요. 역시 예사 모임이 아니라 그런 모양입니다

 

 

 

늦게 온 저를 반겨주는 고마운 친구들. 처음 보는 명희라는 친구와 얘기를 나눠보니 자기는 4학년까지 다니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하네요. "아, 나는 5학년 때 전학을 왔는데. 너랑 나랑은 겹치는 게 하나도 없구나...아무튼 반갑다, 야 "

 

 

야유회에 아이스박스나 큰 솥, 가스통 등은 기본이죠.

얘네들은 누가 개고기 먹고싶다고 한 마디 하면 정말 개를 묶어 몰고 올  기세입니다.

 

 

술과 안주,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자리입니다(BGM으로 That's What Friends Are For가 흐르고)

 

 

 

 

비가 온다고 하더니 날씨마저 선선하고 좋았습니다.

 

 

우린 바베큐통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인수는 제가 예전에 개포동에 혼자 살 때 아침 일곱 시에 전화를 해서 같이 해장술을 청해 마시던 친구입니다. 밤새 술을 마셔도 매너가 흐트러지지 않는 두주불사형. 그러나 안주를 거의 먹지 않는 무서운 인간입니다. 오늘도 깡술을 마시는지 인순이가 쓰던 나무젓가락만 유난히 하얗더군요. 인수야, 제발 안주 좀 먹어라.

 

 

벌써 작년에 아들이 제대를 한 친구도 있고

 

 

올해 딸이 대학에 입학한 친구도 있습니다

 

 

일요일인데도 심각하게 비즈니스 통화를 하는 친구도 있고

 

 

훗날 우리는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좋은 날이었던가, 흐뭇한 날이었던가.  

 

 

 

 

 

 

 

 

이상하게 뒷모습이 불량해 보이는 애들이 있습니다

 

 

 

만국기 펄럭이는 족구장에서 족구도 잠깐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술을 마시느라 바빴죠 

 

 

술에 취하면 가끔 사물이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낮부터 마셔서 좀 일찍 정리 했습니다. 물론 다들 친구 희정이가 하는 음식점으로 이차를 갔지요. 결혼 준비(?)에 바쁜 저는 먼저 술 안 마신 한숙이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왔구요.  반가운 얼굴들이었습니다. 옛친구들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지요. 가을 운동회 때 다시 보자꾸나. 멋진 친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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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라죠? 남의 아이와 나의 아이도 받침 하나 차이로군요. 퇴근길 지하철에서 만난 심플한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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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엔 시동을 끄고 30초만 늦게 내려볼 것

태양아래서만 진가를 발휘하던 썬루프의 전혀 다른매력을 발견할테니

쏘나타는 원래 그렇게 타는 겁니다

자동차에 감성을 더하다 SONATA

 the Brilliant HYUNDAI - NEW THINKING. NEW POSSIBILITIES. "

 

 

 

 자동차 광고는 쉽지 않습니다. 굉장히 비싼 제품이기도 하고 관여도가 높은 제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젯밤 TV에서 이 광고를 보고 더 놀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동차에 감성을 더하다'라는 캠페인 슬로건은 이미 들어본 거라 별 감흥이 없었지만 이렇게 감성적으로 차분하게 광고를 풀어갈 줄은 정말 예상 못했었거든요. (1분짜리는 더 좋더군요)

 

게다가 다른 모든 첨단 기능들을 뒤로 숨기고 '썬루프에 대한 재해석'에만 집중한 점이 좋아보였습니다. 마치 아이폰5의 최신 광고가 카메라 기능에만 집중해 우리의 일상을 새로운 문화로 포장한 것처럼 말이죠. 욕심을 버리고 단순함을 추구하면 이렇게 좋아진다는 걸 알면서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욕심을 버린다는 것 자체가 더 큰 욕심이라는 아이러니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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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재섭이

 

 

제 친구 중에 재섭이란 애가 있습니다. 이놈은 어렸을 때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 세계적으로 이름난 외국계 IT회사의 임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또 인간적으로도 비교적 선량하며 아이를 넷이나 낳아 잘 키우고 있는 착실한 가장인데도 친구들 사이에선 매번 구박을 받는 캐릭터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죠. 그러나 어쩝니까. 만나면 나도 모르게 또 구박을 하게 되는데. 도대체 뭐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재섭이의 가장 큰 단점은 무슨 얘길 하든 잘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얘길 들어도 금방 까먹거나 무심코 흘려듣고 나중에 딴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또 그 얘기가 나오면 마치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얘긴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아~그래? 그랬어?” 하고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재섭인 참 좋을 거야. 뭐든 게 새로우니…”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포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은 다 쉽게 이해하는 유머나 특이한 일화일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몇 년 전 여름 휴가를 함께 갔을 때 일입니다. 모임 멤버 중 유난히 싱거운 농담을 잘 하는 H라는(이분도 큰 유통회사의 부사장님이십니다만) 분이 계십니다. H가 술을 마시다가 ‘흥부가 형수에게 뺨맞은 얘기’를 하며 좌중을 웃기고 있었습니다. 내용인즉슨 배고픈 흥부가 놀부네집으로 찾아갔다가 때마침 혼자 있는 형수에게 “형수, 나 흥분돼(흥분데)”라고 말하는 바람에 주걱으로 뺨을 한 차례 얻어맞고 다시 “형수, 그러지 말고 사정(?) 좀 합시다”라고 말했다가 또 뺨을 얻어맞았다는, 다소 싱거운 음담패설입니다. 그래도 저녁 술 분위기상 사람들은 아주 즐거워하며 웃었습니다. 가장 많이 웃은 사람은 다름아닌 재섭이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재섭이가 옆사람에게 작은 목소리로 “근데 ‘흥분데’라고 말하는데 왜 뺨을 때려?”라고 묻는 게 아니겠습니까. 경악한 사람들은 그걸 모르면서 왜 그렇게 웃었냐고 물었더니 남들이 웃길래 그냥 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 대학 서클 동기 몇 명이 만나 저녁을 먹었습니다. 재섭이 부부도 나왔더군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놀다가 분위기가 좀 처지는 거 같아서 제가 ‘원두막 삼행시’ 얘기를 해줬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밖에서 원두막 삼행시를 듣게 되었습니다.

 


원 :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두 : 두 쪽 다 빨개
막 : 막 빨개

 


이걸 들은 할아버지는 재밌다고 생각하고 집에 가서 식구들에게 이 얘기를 다시 들려주기 위해 기억을 단단히 하고 귀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들 앉아서 밥을 먹을 때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할아 : 얘들아, 내가 오늘 ‘원숭이 삼행시’를 들었는데…
손녀 : 뭔데요, 할아버지? 원!

할아 :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손녀 : 숭!

할아 : 숭하게 빨개.
손녀 : 이!

할아 : 이게 아닌데…?

 


다들 웃었습니다. 물론 재섭이 부부도 많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또 술을 마시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헤어질 때쯤 돼서 재섭이가 제게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야, 근데 두 번째 ‘숭’이 뭐더라?”

 

‘두 번째 숭이 뭐…? 아아, 재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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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파트 앞엔 [신화마트]라는 수퍼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가게처럼 일용잡화를 팔고 밤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 간단한 안주에 맥주도 한 잔씩 하는 그런 평범한 수퍼죠. 우리 커플도 이사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들어갔다가 뻔데기통조림이나 골뱅이에 한 잔 한 뒤로는 단골이 되었습니다. 우리 말고도 그런 손님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골들끼리 친해져서 인사도 나누게 되고 가끔은 누군가 집에서 가져온 ‘사제 안주’를 나눠먹으며 작은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강남 부자 동네와는 좀 다른 정서죠.

 

 

그런데 이 가게가 얼마 전부터 한쪽 공간을 막더니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사장님께 물어보니 가게를 반으로 줄이고 새로 생긴 공간에 작은 치킨집을 열 생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마다 찾아오던 단골 청년들 중 둘은 벌써 며칠째 공사를 맡아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을 거 같았습니다. 이 가게는 바로 옆 토끼굴을 지나 수십 미터만 나가면 한강변이고 뚝섬유원지역도 걸어서 13분 거리입니다. 뚝섬유원지는 여름이면 치킨배달이 엄청 성행하는 곳이죠. 수퍼마켓만 하는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일 거 같았습니다. 우리도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사장님 부부도 반색을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치킨집이라…일단 신화마트가 사업을 확장한 거니까 ‘신화치킨’을 생각하기가 쉽겠죠. 그러나 그건 “아, 신화마트가 치킨집을 냈구나”라는 몇몇 지인들의 반응 말고는 뾰족한 게 없습니다. 별 의미가 없는 네이밍이란 말이죠. 게다가 치킨집 특유의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유머나 특징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닭컴'부터 시작해서 코스닭, 후다닭, 쏙닭쏙닭, 토닭토닭까지 차고 넘치는 게 치킨집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치킨집 이름은 그래야 하는 거니까요.

 

 

 

“닭터 어때? 닭터 치킨!” 제가 여친에게 물어봤더니 그거 괜찮은데, 라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성이 오 씨니까 닭터오 치킨으로 하자. 그리고 닭터라는 상호명은 이미 많을 테니 ‘성수동 닭터오 치킨’으로 하자는 얘기까지 급속도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표기는 ‘닭터5’와 ‘Dr.5’를 병행하면 패러디 아이덴티티도 더 살릴 수 있을 거 같았구요.

 

 

아울러 윤혜자 양은 ‘닭터오 특별 메뉴’까지 즉석에서 제안했습니다. 한 마리가 아니라 닭고기 다섯 조각으로 이루어진 오천 원짜리 특별 상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치킨이 생각나도 만사천원이나 만육천 원쯤 하는 치킨 한 마리를 혼자 시켜먹기엔 부담이 있습니다. 이럴 때 오천 원짜리 ‘닭터오 스페셜’이 있으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죠. 기분 좋게 결론을 낸 우리는 내일 빨리 이 이름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조바심을 내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 간단한 네이밍 기획서를 써가지고 [신화마트]에 갔더니 일단 아주머니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옆에서 공사를 하던 청년들에게도 보여줬는데 다들 좋다고 한 마디씩 하더군요. 닭터5스페셜 메뉴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장님은 며칠 전 다리를 다쳐 네이밍 후보안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오늘 수술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름이 확정되면 간판과 스티커 디자인도 같이 일하던 친구나 동료들에게 부탁해볼 생각입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디자인이 좋으면 더 효과가 좋아지겠죠.

 


뿌듯한 일입니다. 아주머니가 얼마를 내야 하냐고 물으시길래 “저희 비싼 애들이에요. 정식으로 돈 내시려고 하면 너무 비싸니까, 관두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요. 동네에서 그럴 순 없죠. 근데 이름값을 치킨으로 다 받으면 도대체 몇 마리나 되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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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이후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은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였다. 적어도 쿠엔틴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는. 이젠 ‘비디오가게 점원 출신의 영화 천재’라는 수식어는 골백 번도 넘게 들어서 식상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타란티노가 변함없이 천재라는 사실에 쉽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천재들, 특히 예술 쪽 천재들의 특징을 한두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유분방함’과 ‘싸가지’가 될 것이다. 억울한 일이다. 그놈들은 아무렇게나 꾸며대는 거 같은데도 저절로 플롯이 생기고 디테일이 살아난다. 어딘가 혼자 처박혀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결정적 증거를 내놓는 탐정처럼 무심하게 이야기를 툭 던지는 건방진 놈인데도 여자들은 그 앞으로 달려가 콧소리를 낸다. 왜냐하면 그놈들은 하고싶은 대로 해도 좀처럼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당장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면 그게 다 필요한 그림이었고 꼭 필요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니 나 또한 그녀들과 같은 입장이 된다. 생각해 보라. 타란티노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단 흥분이 되지 않던가. 이번엔 또 어떤 얘기로 우리를 낄낄거리게 만들지, 어떤 의외의 캐릭터로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 전두엽 근처가 간잘간질해지지 않던가.

 

 

타란티노의 최신작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남북전쟁 발발 이 년 전 시점의 서부극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서부극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코엔 형제가 그렇듯이 이제 타란티노도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증거를 대볼까? 지금 당장 헐리우드에서 타란티노가 부르면 누구든 달려온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왔고 사무엘 L. 잭슨이 왔다. 윌 스미스는 물망에 올랐다가 너무 매끈하게 생겼다는 지적이 이는 바람에 주연 자리를 제이미 폭스에게 넘겨야 했다. 크리스토프 왈츠는 작년에 [바스터즈;나쁜 녀석들]에 이어 연이은 출연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단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타란티노의 영화에 출연하는 걸까? 아니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데쓰 프루프] 시나리오를 쓸 때였던가? 보통 사람들은 글이 안 풀려 호텔방에서 물구나무를 섰네, 머리를 쥐어뜯었네 어쩌구 하고 있을 때 타란티노는 “어서 이걸 써서 사람들한테 들려줘야 할텐데.”라는 조바심을 가지고 손가락에서 불이 나게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타란티노의 시나리오는 한 마디로 재밌다. 나는 [저수지의 개들]의 그 유명한 오프닝 시퀀스가 지금도 너무너무너무 좋다. 정장을 차려입고 은행을 털러 가기 전 커피숍에 주르르 앉아서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한심한 문제로 마돈나의 [Like A Virgin]까지 들먹이며 싸우는 갱들이라니.

 

그런데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똑 같은 장면이 나온다. KKK단원들이 모여 장고와 슐츠 박사를 공격하기 직전에 말 위에 앉아 흰 복면에 뚫린 눈구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문제로 불만과 수다를 끓여붓는 장면이다. 이 장면 하나만 봐도 이건 타란티노표 영화임에 틀림없다. 또 디카프리오가 흑인 노예의 두개골을 들고 골상학 운운하며 깜둥이들의 노예근성을 설명하는 장면은 어떤가. 이 장면은 가난하던 시절 타란티노가 시나리오를 써서 토니 스코트에게 팔았던 [트루 로맨스]에서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아버지 데니스 호퍼가 “이탈리아 놈들은 모두 깜둥이의 자손”이라며 크리스토퍼 월큰을 약올리던 모습 그대로다. 생각해 보면 타란티노는 변한 게 없다. 그런데도 늘 새롭고 재밌다. 오죽하면 꼬장꼬장한 아카데미 심사위원들도 이번만큼은 별다른 고민 없이 타란티노에게 시나리오상을 안겨 줬을까.

 


타란티노가 서부극을 만들면 어떤 얘기가 될까? 아무래도 존 포드보다는 세르지오 레오네쪽이겠지. 그런데 이건 그 정도가 아니다. 일단 주인공이 흑인이다. 디카프리오는 난생 처음 악역이다. 게다가 백인들은 모두 흑인들에게 병신 취급을 받다가 결국 몰살당한다. 꿈 같은 얘기라고?  그렇다면165분간의 불량식품 같은, 그러나 영양가까지 풍부한 롤러코스터를 지금 당장 타보시라. 당신이 놀러 간 역사공원이 순식간에 놀이공원으로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짐 크로스의 [I Got A Name]을 비롯한 탁월한 선곡들도 놓치지 마시라)

 


아, 참. 타란티노가 사랑스러운 점 한가지 더. 그도 가끔 자기 영화에 출연을 한다. 이번에도 나온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찌질한 역으로 잠깐 출연한다. 이번엔 허리춤에 다이나마이트를 잔뜩 두르고 있다가 어이없이 폭발해 죽는 역이다. 이건 타란티노가 팬심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더 CSI의 에피소드 ‘무덤 속의 위험’(Grave Danger)에서 범인이 자살하던 것과 똑같은 방법이다. 유머 넘치는 구라는 물론 깨알 같은 디테일까지, 역시 타란티노는 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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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서 오줌을 누고 물을 한 잔 마셨는데 잠이 안 오는 경우가 있다. 어제처럼 모듬전에 소주를, 그러나 아주 조금, 아주 간단히 마시고 살짝 졸린 김에 얼른 쓰러져 잔 경우가 그렇다. 계속 자리에 누워있어 봤자 더 자기는 틀렸고 나아가 대한민국 창조경제나 동아시아 문제해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여친이 깰까봐 조심조심 깨끔발을 하며 마루로 나왔다.

 

 

책장앞을 오래도록 서성이다 고른 게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잽싸게 자기 소설 제목으로 써먹는 바람에 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소설가 이기호의 단편집이었다. 그나마 마음에 들어했던 [원주통신]이나 [나쁜 소설]을 다시 한 번 읽을까 하다가 ‘그래도 표제작을 읽어줘야지, 이 새벽엔’ 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단편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미 짐작은 했지만) 이 소설도 전에 내가 읽은 소설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다시 읽어도 이렇게 재미가 있는 건지. 예전엔 별로 안 웃고 넘어갔던 대목까지 다시 읽어보니 새롭게 웃기네. 이거 이거. 아하하하. 어슴프레 밝아오는 여명을 배경삼아 미친놈처럼 낄낄거리며 책을 읽다 보니 문득 배가 고파졌다. 다행히 부엌엔 그저께 점심에 사다 놓은 유기농 모닝빵이 다섯 개나 남아 있었다.

 

 

커피를 끓일까 하다가(양에 맞춰 커피를 갈고, 비알레떼 주전자에 곱게 넣은 뒤 가스레인지에 얹어 끓이고, 에스프레소 원액에 뜨거운 물을 붓기 전에 재빨리 뜨거운 주전자를 씼어 개수대 위에 널어 말리고 하는 과정을 상상하니, 모든 게 너무 귀찮았다. 더구나 이 새벽에!) 포기하고 씽크대를 뒤져보니 차가 있었다. 그래 우아하게 차를 한 잔 하는 거야. 무심코 손에 잡힌 ‘다미안’이란 차를(뭐가 다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한 잔 마시며 책을 마저 읽었다.

 

 

이기호의 소설은 재밌다. 그리고 이기호는 소심하고 찌질하면서도 그 찌질함을 자양분 삼아 전혀 다른 소설을 쓰고야 말겠다는 젊은 소설가로서의 원대한 포부를 펼칠 줄 아는 멋진 사나이다. 그러니 이기호여, 빨리 새 책을 내라. 내 당신 책은 돈 아끼지 않고 엄벙덤벙 사줄테니.

 

 

여친은 자고, 나는 책을 읽고. 해도 뜨지 않은 신새벽부터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는 다시 자야지. 아, 시도때도 없이 즐거운 나는 아무래도 타고난 백수 체질인 모양이다. 백수체질…아냐, 뭐 다른 말이 없을까? 문화인. 그래, 문화인 체질이 훨씬 낫네. 새벽부터 문화인이 된 나는 이제 슬슬 다시 자러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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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에 벚꽃 구경을  가자고 약속을 했놨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그만 중요한 술약속을 깜빡했더라구요. 그래서 그날 약속을 못지킨 미안한 마음에 오늘이라도 벚꽃 구경을 가자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일단 남산에 가기 전에 버스를 타고 도산대로에서 열리는 소피 칼의 전시회에 들렀습니다. 

 

 

 

소피 칼은 자기 일상을 가지고 예술로 만드는 멋진 아티스트였습니다. 이번 전시회 [잘 지내길 바래요]도 자기가 사귀던 남자가 느닷없이 이별 통보로 보낸 이메일의 맨 마지막 문장을 자기가 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석하게 하고 그 결과물로 전시회까지 만든 거였죠. 한 마디로 '구라'가 센 여자입니다. 예술의 절반은 구라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재미있는 전시회였습니다.

 

 

아침을 늦게 먹었는데도 또 배가 고프다고 제가 칭얼대서 신사동 강남시장 골목에 있는 칼국수집 [가로수길 생칼국수]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여긴 바지락칼국수와 들깨수제비가 맛있습니다). 제가 얼굴에 계속 카메라를 들이대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야, 또 시커멓게 나왔네!"라는 말만 반복하니까 여친도 짜증이 나는 모양입니다. 하긴 증 날 만도 하지요. 사진 배우는 속도가 이렇게 느려서야 어디. ㅎㅎㅎ 

 

 

그러나 기어코 예쁜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습니다.

 

 

남산 산책로를 올라가며 벚꽃 구경을 싫컷 했습니다. 이미 활짝 피고 져버린 애들도 많지만 이렇게 천천히 피라면 정말 천천히 피는 순한 애들도 있습니다.

 

 

전기버스 충전하는 게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엄마가 아이에게 "버스도 맘마를 먹어야 힘을 내겠지? 그래서 지금 맘마 먹는 거야."라고 예쁘게 설명해 주시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아이는 정말 열심히 듣고. 따사로운 장면이었습니다. ^^

 

 

우리 어머니 세대처럼 올드패션 모드로 한 번 찍어보자고 했더니 고맙게도 혜자 양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70년대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꽃보다 더 활짝 웃는 그녀. 그녀가 웃으면 세상이 따라 웃습니다.

 

 

남산도서관쪽엔 아직도 벚꽃 기세가 대단하더군요.

 

 

접사도 시도해 봤죠. 그런데'이름모를 꽃'이라고 하면 안 된다지요? 그래서 이름을 적어놓은 표지판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놨습니다. 이 꽃은 '오스테오스 펄멈'이랍니다. 어렵습니다.ㅜㅠ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오늘 남산엔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야외무대에선 로이킴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더군요)

 

 

 

 내려오는 길에 회현시범아파트를 보았습니다. 문득 저기선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너무 낡은 아파트라서요.

 

 

시범아파트가 생길 때 같이 생긴 가게들이겠죠? 맞은편에 '시범부동산'도 있더군요.^^ 

 

 

명동길을 내려오다가 정말 머리털이 인형같은 뒷모습의 여자애들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빠가 앞에 안은 아이까지 셋이더군요. 모두 다 딸이었습니다. 사진 좀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괜찮다고 해서 찍었습니다.

 

 

명동신세계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며 책도 읽고(전시회장에서 소피 칼과 폴 오스터가 함께 작업한 책 [뉴욕 이야기]와 소피 칼이 쓴 책 [진실된 이야기]를 샀습니다) 노닥거리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집으로 돌아오기 전 혜자 양이 밥하기 귀찮다고 해서 동네 설렁탕집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많이 걸어서 그런지 둘 다 생각보다 밥도 많이 먹고 소주도 한 병 나눠마시고 했더니 그만 또 배가 불러서 다시 한강변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결국 열시 반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젠 자야죠. 정말 꽉차게 보낸 일요일이었네요.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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