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후]라는 영화가 있다. [트레인스포팅]을 만들었던 대니 보일 감독의 이 작품은 시민들의 자발적 도움을 얻어 찍었다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런던의 시가지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좀비 영화의 걸작이다. 나중에 [28주후]라는 속편도 나온 이 작품을 보면서 감탄했던 건 좀비 영화이면서도 인간의 ‘관계’에 대해 냉철하게 질문하는 그 철학적 깊이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같이 도주하던 가족이나 애인이라도 좀비에게 물리거나 그 체액이 눈이나 입으로 떨어지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2초 이내로 망설임 없이 죽여야 하는 딜레마가 등장한다. 이미 좀비로 변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이라면 바로 전까지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사람을 애도 기간도 없이 그 즉시 죽일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대중적인 장르영화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드문 경험이었다.
정유정의 [28]은 정식 병명도 지어질 틈 없이 그저 ‘빨간눈’이라고만 알려진 인수공통전염병이 도는 가상의 도시 ‘화양’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황극이다. 개와 사람만 걸리고 퍼지는 이 병은 전염되자마자 눈동자와 눈 주위가 빨간 색으로 변한 뒤 사흘을 넘기 전에 사망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질병이다. 치료약도, 대책도 없다.
만약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정부는,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나올까? 정유정은 그런 의문에서 소설의 얼개를 엮어나간다. 먼저 정부와 다른 도시 사람들은 이 지역을 봉쇄할 것이다. 그리고 화양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개들을 전염병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살육을 감행할 것이다. ‘미친개’ 또는 ‘병을 옮기는 짐승’이라는 말 앞에서 살처분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정당하게 들리는가.
작가는 구제역 파동 때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장면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TV에서 그 필름을 본적이 있다. 처음엔 수많은 돼지들이 트럭에서 비명을 지르며 커다란 구덩이로 쏟아지는 장면들이 너무 참혹해서 눈을 감았었는데, 잠시 후 그걸 찍던 VJ가 카메라 옆에서 엉엉엉 통곡을 하는 소리에 눈을 떴던 기억이 난다. 전달자로서 냉정을 유지해야 할 그녀의 울음소리는 뜻밖이었고, 순간 감정이입이 되었으며, 조금 후에 우리는 과연 돼지나 닭들을 이처럼 태연하게 살처분할 자격이 있는가? 이러다 죄받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소설은 수의사 서재형, 신문기자 김윤주, 119구조대장 한기준, 개를 살해하는 싸이코 박동해, 그리고 늑대개 링고의 시점을 번갈아 오가며 진행된다. 다인칭 시점은 외국 스릴러물에서도 자주 보는 것이지만 이처럼 개에게도 인격(?)을 부여한 것은 이 작품의 주제에도 부합하는 매우 탁월한 선택이요 플롯이었다.
정유정은 ‘정말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인가?’라는 명제를 주인공인 서재형에게 부여한 채 스피디한 문장들로 무간지옥에 갇힌 인간군상들을 거침없이 그려 나간다.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기로 유명한 작가답게 동영상처럼 그려지는 119구조대의 시스템 묘사나 인수공통전염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 그리고 너무도 생생한 응급실과 간호사들의 세계(간호사 출신인 정유정 작가는 학생시절에 간호학과를 다닐 때도 국문과 친구들의 과제를 대신 써주곤 했다고 한다)에 대한 디테일에 힘입어 소설 속 화양은 점점 실제 공간으로 변해 간다.
특히 정유정은 악인을 묘사할 때 힘이 넘친다. 이번 소설에서는 박동해라는 인물이 단연 돋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형이나 여동생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하고 급기야 아버지에게 창고에 갇힌 경험까지 갖고 있던 동해는 집에 있던 개 쿠키를 잔인하게 죽이려다 우연히 수의사 재형을 만나는 바람에 실패하고 군대로 끌려간 싸이코다. 그러나 군대 안에서 여러 마리의 개를 잔인하게 도륙함으로써 존재증명을 하다 쫓겨나 결국 엉뚱하게도 한기준이 대장으로 있는 소방서에 파견근무를 하게 된 문제적 인물이다.
보통 이 정도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면 클라이맥스까지 끌고 가서 주인공과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정유정은 이번 작품에서는 절대 악인 박동해를 너무 일찍 죽여버린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작가는 [28]이라는 소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적 상황들을 즐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통제된 공간 속에서 국가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군대는 어떻게 움직이며 사람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를 시뮬레이션하듯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통신은 어떻게 단절되며 언론이나 SNS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나아가 30년 전 광주와 지금의 이 상황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군인들이 개를 총으로 쏴죽이고 트럭으로 싣고 가 날카로운 창칼이 버티고 서 있는 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 넣는 장면들은 끔찍하다. 한기준의 부인이 어린 딸을 안고 분노한 개들에게 목이 물려 죽는 장면도 섬찟하다. 방독마스크 안으로 붉게 변해가던 동료들의 슬픈 눈두덩들은 또 어떤가. 그의 이번 소설이 너무 무섭고 잔인해서 읽기 싫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정유정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간결하게, 손에 잡힐 듯 글로 쓴다.
그리고 이 작가에게 ‘하드보일드’만 있는 건 아니다. 곳곳에 심드렁하고 무심한 농담 같은 문장들을 툭툭 던져놓는가 하면 자신의 예전 작품에 나오는 인물을 재미로 슬쩍 끼워 넣기도 한다(정신병원의 환자 김용).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라고 밝혔던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애정도 놓치지 않는다(챈들러 얘기로는, 술이 사랑과 같다던데요. 첫 키스는 마법 같고, 두 번째는 친밀하고, 세 번째는 지겹다). 그리고 애잔한 마음을 묘사할 땐 눈물을 감추지 못하게 하는 마력도 있다. 난 쿠키가 죽은 뒤 그 개에 대한 추억과 소회를 밝히는 174페이지부터 한 장 반까지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으며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등장’이라 여겨졌던 [7년의 밤] 이후 또 정유정이다. 난 그녀가 좋다. 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철저한 준비,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거침없이 버리고(자기가 쓴 걸 버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다시 쓰는 프로정신이 좋다. 글이 안 될 땐 어떻게 하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술 먹지. 혼자 술 먹고 울면서 벽에 머리를 쿵쿵 박는 거지.”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좋다. 더구나 이번 소설은 엔터테인먼트를 뛰어넘는 묵직한 울림까지 있다. 올 여름은 [28]을 읽은 친구들과 함께 시원하게 한 잔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