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1 밀전병, 전, 두부김치 등을 떠올리지 않는다

 

2 돼지, 소, 닭 등 안주용 동물을 생각하지 않는다

 

3 짜장면, 오징어튀김 등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을 오후 3시쯤 배불리 먹는다

 

4 스마트폰을 열어 통장 잔고를 확인해보지 않는다

 

5 퇴폐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나 인생 뭐 있냐고 징징대는 소설가의 SNS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지 않는다

 

6 그 자식은, 그 년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따위의 오지랍을 부리지 않는다

 

7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를 듣지 않는다

 

8 라디오헤드의 ‘Creep’도 듣지 않는다

 

9 콜드플레이의 ‘Fix You’도 듣지 않는다

 

10 킹 크림슨의 ‘Epitaph’는 절대로 듣지 않는다

 

11 블랙사바스의 모든 곡을 듣지 않는다

 

12 [병원24시], [다큐멘터리 사랑] 등의 TV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13 동창회장에게 불참통보 메시지를 보낸다

 

14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는다

 

15 학점을 짜게 준 교수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는다

 

16 가스활명수 한 병만 마셔도 취하는 인간과 저녁 약속을 잡는다

 

17 국내 정치뉴스를 보지 않는다

 

18 화장실 물때 청소를 하지 않는다

 

19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지 않는다



20 일찍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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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후]라는 영화가 있다. [트레인스포팅]을 만들었던 대니 보일 감독의 이 작품은 시민들의 자발적 도움을 얻어 찍었다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런던의 시가지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좀비 영화의 걸작이다. 나중에 [28주후]라는 속편도 나온 이 작품을 보면서 감탄했던 건 좀비 영화이면서도 인간의 ‘관계’에 대해 냉철하게 질문하는 그 철학적 깊이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같이 도주하던 가족이나 애인이라도 좀비에게 물리거나 그 체액이 눈이나 입으로 떨어지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2초 이내로 망설임 없이 죽여야 하는 딜레마가 등장한다. 이미 좀비로 변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이라면 바로 전까지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사람을 애도 기간도 없이 그 즉시 죽일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대중적인 장르영화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드문 경험이었다.

 


정유정의 [28]은 정식 병명도 지어질 틈 없이 그저 ‘빨간눈’이라고만 알려진 인수공통전염병이 도는 가상의 도시 ‘화양’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황극이다. 개와 사람만 걸리고 퍼지는 이 병은 전염되자마자 눈동자와 눈 주위가 빨간 색으로 변한 뒤 사흘을 넘기 전에 사망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질병이다. 치료약도, 대책도 없다.

 

만약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정부는,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나올까? 정유정은 그런 의문에서 소설의 얼개를 엮어나간다. 먼저 정부와 다른 도시 사람들은 이 지역을 봉쇄할 것이다. 그리고 화양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개들을 전염병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살육을 감행할 것이다. ‘미친개’ 또는 ‘병을 옮기는 짐승’이라는 말 앞에서 살처분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정당하게 들리는가.

 

작가는 구제역 파동 때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장면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TV에서 그 필름을 본적이 있다. 처음엔 수많은 돼지들이 트럭에서 비명을 지르며 커다란 구덩이로 쏟아지는 장면들이 너무 참혹해서 눈을 감았었는데, 잠시 후 그걸 찍던 VJ가 카메라 옆에서 엉엉엉 통곡을 하는 소리에 눈을 떴던 기억이 난다. 전달자로서 냉정을 유지해야 할 그녀의 울음소리는 뜻밖이었고, 순간 감정이입이 되었으며, 조금 후에 우리는 과연 돼지나 닭들을 이처럼 태연하게 살처분할 자격이 있는가? 이러다 죄받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소설은 수의사 서재형, 신문기자 김윤주, 119구조대장 한기준, 개를 살해하는 싸이코 박동해, 그리고 늑대개 링고의 시점을 번갈아 오가며 진행된다. 다인칭 시점은 외국 스릴러물에서도 자주 보는 것이지만 이처럼 개에게도 인격(?)을 부여한 것은 이 작품의 주제에도 부합하는 매우 탁월한 선택이요 플롯이었다.

 

 

정유정은 ‘정말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인가?’라는 명제를 주인공인 서재형에게 부여한 채 스피디한 문장들로 무간지옥에 갇힌 인간군상들을 거침없이 그려 나간다.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기로 유명한 작가답게 동영상처럼 그려지는 119구조대의 시스템 묘사나 인수공통전염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 그리고 너무도 생생한 응급실과 간호사들의 세계(간호사 출신인 정유정 작가는 학생시절에 간호학과를 다닐 때도 국문과 친구들의 과제를 대신 써주곤 했다고 한다)에 대한 디테일에 힘입어 소설 속 화양은 점점 실제 공간으로 변해 간다.


특히 정유정은 악인을 묘사할 때 힘이 넘친다. 이번 소설에서는 박동해라는 인물이 단연 돋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형이나 여동생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하고 급기야 아버지에게 창고에 갇힌 경험까지 갖고 있던 동해는 집에 있던 개 쿠키를 잔인하게 죽이려다 우연히 수의사 재형을 만나는 바람에 실패하고 군대로 끌려간 싸이코다. 그러나 군대 안에서 여러 마리의 개를 잔인하게 도륙함으로써 존재증명을 하다 쫓겨나 결국 엉뚱하게도 한기준이 대장으로 있는 소방서에 파견근무를 하게 된 문제적 인물이다.

 

보통 이 정도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면 클라이맥스까지 끌고 가서 주인공과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정유정은 이번 작품에서는 절대 악인 박동해를 너무 일찍 죽여버린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작가는 [28]이라는 소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적 상황들을 즐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통제된 공간 속에서 국가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군대는 어떻게 움직이며 사람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를 시뮬레이션하듯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통신은 어떻게 단절되며 언론이나 SNS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나아가 30년 전 광주와 지금의 이 상황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군인들이 개를 총으로 쏴죽이고 트럭으로 싣고 가 날카로운 창칼이 버티고 서 있는 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 넣는 장면들은 끔찍하다. 한기준의 부인이 어린 딸을 안고 분노한 개들에게 목이 물려 죽는 장면도 섬찟하다. 방독마스크 안으로 붉게 변해가던 동료들의 슬픈 눈두덩들은 또 어떤가. 그의 이번 소설이 너무 무섭고 잔인해서 읽기 싫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정유정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간결하게, 손에 잡힐 듯 글로 쓴다.

 

 

그리고 이 작가에게 ‘하드보일드’만 있는 건 아니다. 곳곳에 심드렁하고 무심한 농담 같은 문장들을 툭툭 던져놓는가 하면 자신의 예전 작품에 나오는 인물을 재미로 슬쩍 끼워 넣기도 한다(정신병원의 환자 김용).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라고 밝혔던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애정도 놓치지 않는다(챈들러 얘기로는, 술이 사랑과 같다던데요. 첫 키스는 마법 같고, 두 번째는 친밀하고, 세 번째는 지겹다). 그리고 애잔한 마음을 묘사할 땐 눈물을 감추지 못하게 하는 마력도 있다. 난 쿠키가 죽은 뒤 그 개에 대한 추억과 소회를 밝히는 174페이지부터 한 장 반까지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으며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등장’이라 여겨졌던 [7년의 밤] 이후 또 정유정이다. 난 그녀가 좋다. 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철저한 준비,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거침없이 버리고(자기가 쓴 걸 버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다시 쓰는 프로정신이 좋다. 글이 안 될 땐 어떻게 하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술 먹지. 혼자 술 먹고 울면서 벽에 머리를 쿵쿵 박는 거지.”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좋다. 더구나 이번 소설은 엔터테인먼트를 뛰어넘는 묵직한 울림까지 있다. 올 여름은 [28]을 읽은 친구들과 함께 시원하게 한 잔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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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가방

길위의 생각들 2013. 7. 8. 22:51

가방의 상표는 중요하지 않다.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가 진짜다. 그 안에 현자들이 쓴 수상록이 한 권 들어있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재밌는 소설책이나 면도칼처럼 예리한 시집 한 권이 들어있다면, 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의 단초를 메모한 종이조각이 한 장 들어있다면 비닐쌕이라도 명품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비싼 가죽가방이라도 그 안에 화장품, 핸드폰, 카드명세서, 피임기구 같은 잡동사니들만 가득차 있다면 그 가방은 '수고한 자신을 위해 스스로에게 선물한'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가방 안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 당신의 가방은, 당신이다.

 

 

 

(*오늘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나 페북에 올렸던 글. 그러나 페북에 올린 글은 흘러가기 십상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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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vertising Agency: Wieden + Kennedy, London, UK

Executive Creative Directors: Tony Davidson, Kim Papworth

Creatives: Chris Lapham, Aaron McGurk

Producer: James Guy

Client services: Laura McGauran, Paulo Salomao

Production Company: Nexus

Directors: Smith & Foulkes

Executive Creative Director: Chris O Reilly

Producer: Tracey Cooper

Production Assistant: Fernanda Garcia Lopez

Director of Photography: Clive Norman

Editorial Company: Trim Editing

Editors: Paul Hardcastle and David Slade

VFX Company: Nexus Productions & Analog

 

오늘 친구 중 한 명이 페북에 올려줘서 알게 된 혼다의 기업PR "Hands"편입니다. 고정된 카메라 앵글에 맨손이 등장해 볼트를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등으로 바꿔가며 장난감 만지듯 마술을 부리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영상이네요. 그런데 혼다는 왜 이런 필름을 만들었을까요? 그냥 재밌으라고 만든 건 아니겠죠? 혼다 홈페이지나 유투브에 있는 설명을 읽어보니 지난 65년 간 혼다가 이룩해 온 여러 가지 기술력도 보여주고 미래 기술도 보여주려고 만든 광고라고 합니다.

 

기업PR인데도 아주 미니멀하게 접근했고, 혼다에게 어울릴만한 젊고 세련된 소비자들을 타겟으로 할 얘기 다 하고 있는 영악한 광고입니다. 마침 유투브에 스텝 프로파일이 있어서 함께 올려봅니다. (아, 중간에 자동차를 쥐어짜 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장면은 수소연료((전지))자동차 얘기랍니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배기구에서는 물이 나오게 된다는 원리라네요: 친구 노상범의 페친인 하채효라는 분의 댓글 설명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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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학습만화 WHY? 시리즈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책은 ‘똥’ 편이라죠. 어른들이 “냄새 나, 지지야!” 하면서 터부시하고 호들갑 떠는 똥이라는 존재가 버젓이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 것에 아이들은 더 열광하는 모양입니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는 어느날 바깥세상이 궁금한 두더지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누군가의 똥을 맞으면서 시작됩니다. 눈이 나쁜 두더지는 자기 머리 위에 똥을 싸놓고 도망간 동물을 찾지 못한 것이죠. 화가 난 두더지는 범인을 찾기 위해 비둘기, 말, 토끼, 염소, 소, 돼지 등 주변 인물(?)들을 수사하고 다닙니다.

 

 

추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가는 곳마다 “나, 아니야. 내 똥은 이렇게 생겼는걸?”이라며 자신의 똥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생태계 학습을 시킵니다. 그러다가 두더지는 똥덩어리를 핥아먹고 있는 파리들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얻게 되죠. 마침내 법인을 찾은 겁니다. 두더지는 자신이 당한 것처럼 똑같이 정육점집 개 한스의 이마 위에 똥을 떨어뜨려 복수하고는 기분 좋게 땅 속으로 돌아갑니다.

 

 

이 동화를 쓰고 그린 베르너 홀츠바르트와 볼프 에를브루흐는 오랫동안 광고대행사에서 일러스트와 기획 일을 하던 사람들이랍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흥미진진한 추리극 형식에 통쾌한 복수극이기도 한 동화, 아직 못 보셨으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지금 사면 똥덩어리가 그려진 부채도 부록으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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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비(아내의 닉네임)가 제주도를 좋아하는 바람에 저도 벌써 네 번이나 제주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결혼을 하고 나서 처음 가는 제주였죠. 우리는 남들과 달리 일요일 오후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쌔비가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 평일에 여행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지금 뿐이었거든요. 태풍과 장마전선이 몰려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비오면 제주 가서 이박삼일 동안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보고 오면 되지 뭐. 이런 얘길 주고받으면서요.

 

이번 여행의 포인트는 ‘저렴하게, 실속있게’였습니다. 최근의 초호화 결혼식, 초호화 하와이 신혼여행 등등으로 인해 분에 넘치는 소비를 단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한 저희들은 이젠 또 굳이 비싼 돈을 들여 고급스런 숙소에서 자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비행기는 민간항공 중에서도 평일 노선으로, 그리고 숙소는 호텔이나 펜션이 아닌 민박집으로 하기로 기준을 세웠습니다.


평소 제주도와 관련된 트위터리안들을 많이 알고 지내는 쌔비가 트위터로 문의를 해보니 몇몇 분들이 ‘써니허니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을 알려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게스트하우스보다는 민박을 원하던 바, 고맙게도 ‘써니허니’의 주인장께서 친히 알려준 민박집이 바로 ‘성산가는길’이었습니다.

 

 

 

 

올레 20코스 근처에 있고, 2인 1실에 5만 원. 방마다 욕실이 딸려있답니다. 우리는 괜찮은 가격이라 생각했습니다. 항공료도 세금까지 합쳐 채 5만 원이 안 되는 가격이었으니 그야말로 ‘격’이 맞는 셈이었죠. 그런데 막판에 동행이 하나 생겼습니다. 쌔비가 페이스북에 올린 우리의 여행 계획을 듣고 반응을 보인 ‘예전부터 아는 동네 형’이었던 근식이 형을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싱글인 근식이 형은 다름 방에 묵어야 하는데 혼자 5만 원을 내는 건 좀 … 하고 있는데 쌔비가 집주인과 문자메시지를 통해 4만 원으로 합의를 보았다며 웃습니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제주시에 있는 ‘오막칼국수집’에서 점심부터 한라산을 부어라 마셔라 하던 우리들은 세화 바닷가에서 맥주를 또 한 잔씩 하고 좀 취한 상태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성산가는길’에 도착했습니다. 세화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니 잔디밭 위에 보도블럭이 깔린 단아하고 조용한 민박집 입구가 보였습니다.


주인은 50대의 온화한 인상을 가진 사장님과 사모님이셨는데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원래 이곳 분들이 아니고 부천에 사시다가 거기에 20대 딸 둘을 남겨두고 ‘독립’ 하셨다고 하네요. 사장님은 그동안 쭉 건축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제주도에 내려오셔서는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니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잠깐 나갈 때도 DSLR카메라를 들고 다니시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집안이 환하고 조용해서 좋았습니다. 흔히 여행을 가면 여러 다른 팀들과 살을 비비고 지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긴 두 팀만 꾸려와도 독채를 온전하게 쓸 수 있고 또 각 방마다 안쪽으로 화장실이 딸려 있어서 아주 마음이 편했습니다. 더구나 두 팀이 오면 나머지 한 팀은 받지 않는다는 방침이 놀라웠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생계형 민박집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죠. 민박집 뒷뜰엔 두 분이 가꾼 여러 채소와 꽃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3년쯤 뒤면 더 예뻐질 거라는 사모님의 말씀에 쌔비는 벌써 감동을 먹은 눈치였습니다.


가운데에 자리한 거실의 낮은 탁자와 벤치, 그리고 한쪽에 있는 컴퓨터 책상도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주방과 잘 어울리는 구도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운데 놓인 책장이 마음에 들었는데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단행본들 사이사이로 사진 관련 서적이나 포토그래퍼들의 에세이가 많았습니다. 사장님의 취향이 묻어나는 컬렉션이었습니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를 모토로 삼고 있는 저희들은 이날 저녁도 해녀박물관 근처에 있는 ‘별방촌’이란 횟집에 가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과음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사모님께서 맛있는 죽을 쑤어서 가져다 주시는 게 아닙니까. 우린 이게 웬떡이냐, 웬죽이냐 하면서 맛있게 먹는 수밖에요. 물론 태어나자마자 서울 생활을 하셨다지만 그래도 사모님은 부산 출신이라는데 의외로 반찬들이 모두 정갈하고 맛깔스러웠습니다.

 

 

 

 

 


둘째날 큰그리오름에 다녀와 좀 지쳤던 우리들은 “오늘 저녁엔 집에서 먹는 게 어떠냐?”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민박집이 편안하고 깨끗해서 그게 더 나을 듯했습니다. 쌔비가 전화로 여쭤보니 고기만 사오면 나머지는 대충 준비를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농협하나로마트에 들러 돼지목살과 술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사모님은 벌써 탁자 위에 신문지를 깔고 고기를 구울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먹던 거’라며 같이 내오신 밥까지 염치없이 얻어먹던 우리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시자’고 청한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두 분이 너무나 반가워하시며 술과 찬을 가자고 건너오시는 게 아닙니까.


그때부터 즐거운 술자리의 향연이었습니다. 월요일 저녁이라 민박엔 다른 손님도 없고 우린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점잖게 생긴 두 분이 부천에 과년한 딸들을 남겨두고 연고도 없는 제주까지 내려와 ‘독립’하게 된 사연. 저희들이 각각 카피라이터와 출판기획자, 작곡가 등의 일을 해오면서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 저희 부부가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드라마 등등 이야기마다 웃음과 공감이 끊길 틈이 없었습니다.

 

사모님은 나이가 드셔도 아직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사모님은 [내일을 향해 쏴라]와 [졸업]에 나온 캐서린 로스를 닮았다고 아부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근식이 형이 ‘바다가 육지라면’을 부른 가수 조미미를 닮았다고 초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혜자는 사모님도 미인이지만 사장님이 참 잘 생기셨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 할 때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날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래저래 두 부부께서도 오랜만에 마음껏 웃어보았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물론 사장님 사모님께서 안채로 돌아가신 후에도 저희들의 ‘부어라 마셔라’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지요. 센스있는 사장님께서 한라산을 몇 병 더 남겨놓고 가셨더라구요.

 

 

 

 


쌔비는 사모님이 마당에서 자신을 부를 때 “손님!”이라고 하는 대신 “혜자 씨~”라고 부르는 게 정말 정겹고 좋았다고 합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나쁜 마음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 더 즐거운 시너지 효과가 생깁니다. '성산가는길'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저희는 다음날 아침 또 ‘우리가 먹던 거’라는 뻔한 거짓말에 속는 척하며 콩나물국을 얻어먹고 나왔습니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첫날 빼고는 쨍쨍하게 맑기만 했던 제주도 여행. 이번 일정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장소에서 게으르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평화로웠던 B&B(Breakfast & Bed)형 민박집 ‘성산가는길’이 있었죠. 정말 다시 와서 묵고 싶은 집입니다.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657(상도로 5-2)

010-5549-9908 / 010-8294-9908

http://blog.naver.com/stella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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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공항 – 제주시 [오막집국수] – 함덕해수욕장 – 구좌읍 상도리 – 민박집 [성산가는길] -  저녁 해녀박물관 옆 [별방촌] 

 

* 둘째날 / 상도-박물관 점심 [생이소리] – 큰그리오름 - 저녁 민박집 [성산가는길]

 

* 셋째날/ 우도 – 성산 -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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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감독의 인터뷰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류승룡이나 이병헌과 일 할 때는 적어도 주인공이 대사를 못 외워서 NG가 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당대의 스타로 군림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죠. 테너 가수의 진짜 실력은 ‘감기 걸렸을 때 목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뭣뭣 때문에…’, ‘나도 그 위치에 있으면…”, ‘하필 그때…’ , 등등의 핑계를 대며 자신에게 무한정 관대한 판결만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선 저부터 반성해 볼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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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신부가 참 많이 웃었습니다.

우는 것보다 백 배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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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이유

독서일기 2013. 6. 19. 12:08

예전에 버트 레이놀즈가 사립탑정으로 나오는 영화를 TV에서 틀어준 적이 있었다. 도서관 서가에서 매력적인 여자를 만난 버트. 처음 만난 사이인 그녀가 무심코 책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친절하게 대답을 해준다. 여자가 책 표지에 손을 댈 때마다 “그것도 읽었죠. 그것도 읽었어요. 네, 그것도…” 순간 눈빛이 따뜻해지는 여자. 그 다음 점프컷은 둘이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이었다.

 

그때부터 나도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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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오는 광고 중 가장 뛰어난 건 역시 아이폰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더 많은 추억을 담는다’ 편에 이어 어제부터 방송된 ‘일상 편을 보았습니다. 얼핏 보면 이 광고들은 아이폰의 여러 기능 중 하나인 카메라나 음악에 대한 제한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건 정말 엄청난 기업PR입니다.

 

 


'추억을 담는다' 편

 

TVCF에서 보기

 

촬영, 편집, 연출 등 나무랄 데 없는 테크닉으로 구성된 ‘더 많은 추억을 담는다’ 편을 보시죠. 우리는 길을 가다가도, 조깅을 하다가도 뭔가 찍고 싶은 게 있으면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듭니다. 집안에서 장난칠 때도 찍고 콘서트장에서도 찍습니다. 여행길에 인증샷을 남기려 남에게 부탁할 때도 이젠 카메라 대신 아이폰을 건냅니다. 침대 위에서 재미있는 옷을 입고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혼자 웃는 어린아이의 모습 위로 “매일 더 많은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폰에서.”라는 카피가 흐릅니다. 아이폰은 이미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고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놓는 가장 선명한 아이콘이 된 것입니다.

 

 

'생활' 편

 

TVCF에서 보기

 


‘생활’ 편은 음악 이야기입니다. 운동 중에도, 길에서도, 연인끼리도 무심코 즐기는 음악. 이젠 오디션장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심지어 욕실에서도 누구나 손쉽게 아이폰과 이어폰만 있으면 듣고싶은 음악을 고음질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면 장면들이 너무나 쉬운 모습이고 자연스러운 일상입니다. 그 위에 흐르는 “매일 더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즐깁니다. 아이폰에서.” 라는 카피에서는 "우리가 인류의 생활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켜 놓았는지 한 번 보아라" 라고 외치는 애플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죠.

 

 

정말 자신있는 사람은 새삼 크게 소리치거나 핏대를 올릴 필요 없이 작고 나지막히 얘기만 해도 다 통한다는 사실을 아이폰 광고는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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