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정책기획관의 "국민의 99%는 개나 돼지와 같다”라는 발언 덕분에 인간의 가치가 그리 높게 느껴지지 않을 때 마침 <곰의 아내>라는 연극을 보았다. 왜 '곰의 아내'냐 하면 주인공인 소녀가 어느날 산에서 발을 다쳐 길을 잃었다가 곰을 만나 그의 새끼까지 낳고 살게 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살을 하려던 한 남자를 구해주게 되는데 그에게 자신이 곰의 아내였으며 자신의 새끼를 사냥꾼이 죽여버린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 곰 대신 그 남자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새롭게 아이를 낳고 살게 된다. 다분히 신화적인 이야기이다. 일단 곰이 나오니 우리의 단군신화나 웅녀 생각부터 떠오른다. 


남산예술센터는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이어 두 번째로 온 곳인데 원형강의실처럼 구성되어 있어 무대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최소한의 효과만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심플한 시스템이라 올때마다 기분 좋은 극장이었다. 객석도 입식좌석을 고정시켜 놓은 형태라 공간 낭비가 적고 편안하다. 물론 내가 연극 공연 도중 무심코 발을 좀 길게 뻗었다가 앞에 앉은 여자 관객의 옆구리를 건드리는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말이다. 


영화 <화장>과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열연했던 배우 김호정의 호연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다만 팜플릿의 인삿말에서부터 작가와 연출의 변이 서로 부딪히는 것을 읽게 된다는 건 안쓰러운 일이었다.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수많은 곰아내들이 있습니다"라고 쓰며 이는 곧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동굴 속으로 들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자신도 수 많은 곰아내 중의 하나였다가 연극을 하고 글을 쓰며 무사히 걸어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래 쓴 희곡 <처의 감각>이 아니라 각색된 대본 <곰의 아내>로 공연을 하게 된 점이 대해 송구한 마음이라고 썼다.


작가가 '곰의 아내'라는 것을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읽은 것에 비해  연출가 고선웅은 함께 살기 시작한 남자가 생활의 짓눌려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고 여자도 결국 이전에 같이 살던 곰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에 촛점을 맞춘듯 하다. 이는 세계관에 대한 충돌이다. 작가는 신화적 해석을 하는 반면 연출가는 이 모든 과정을 '샐러리맨의 딜레마' 정도의 메타포로 좁히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극은 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하고 공허하게 흘러간다. 작가의 의도대로 공연이 되었으면 훨씬 더 단단한 장면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내도 <처의 감각>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한 번 이 연극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나 연출 둘 다 쟁쟁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래서 어느 사람이 옳다고 말할 순  없다. 더구나 예술은 '타협'의 세계가 아니다. 다만 극단 '마방진'의 특징이라고 하는 과장된 톤과 문어체 형식의 대사를 조금 더 살려서 가슴 뜨거운 장면들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마지막에 진짜 곰이 잠깐 출현하는 키치함 대신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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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부터 허리가 아파서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난리를 치다가 퇴근시간에 교보문고에 목보호대를 사러 간김에 참지 못하고 책을 또 한 권 샀다. 곽재식의 작품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다. 곽재식은 옴니버스 소설집에 실렸던 단편 <박시은 특급>을 읽고 홀딱 반했던  소설가다. 버스 안에서 읽은 그의 데뷔작 <달과 육백만 달러>도 재미있는데 그 다음에 실린 <최악의 레이싱>은 심하게 웃기고 착하고 재미있다. 마치 배명훈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다. 아껴놨다가 내일부터 한 편씩 천천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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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외로움'을 이겨낸다는 것이다. 스스로 홀로 되어 자신과 마주하고 세상과 독대하며 깊은 생각을 가다듬고 마침내 깨닫는 것, 이것이 모든 대가의 첫걸음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랬고 수많은 음악가, 예술가들이 뭔가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홀로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독공]의 저자 배일동도 그런 사람이다. 가난 때문에 원양어선을 타다가 뒤늦은 나이에 소리를 배운 그는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어 7년 간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공부를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를 닦아세운 것이다. 그래서 [독공]은 우리나라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 분야에서 대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철학적 본보기이기도 하다. 



그는 성숙한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재주와 정신이 함께 익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주만 있고 덕이 없어서도 곤란하고, 반대로 덕이 빛나지만 재주가 변변치 않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리공부를 하는 한편으로 수 많은 책들을 읽고 익혔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낱 소리꾼인 그가 어찌 이리 많은 한자를 알고 이렇게 많은 동서양의 지식을 쌓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책을 조금 더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가 공부를 택한 까닭은 이렇다. 외국 공연을 많이 다니면서 실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더불어 묻어오는 칭찬도 찬사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외국 음악가나 예술 석학들로부터 어떻게 판소리에 대한 영어 이론서가 하나도 없느냐는 질문을 들은 후로는 그 많은 칭찬과 찬사가 졸지에 빛을 잃었다. 자신의 소리를 한 자락 들려주면 누구라도 단박에 눈물을 터뜨리게 할 자신은 있지만 조금만 더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 판소리에 대한 변변한 책 한 권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물론 그를 가르친 선배들 스승들도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문서상으로 이론적인 토대를 탄탄하게 쌓아놓은 이는 없었다. 


판소리의 역사는 삼백 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속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예술 철학이 담겨 있는데. 자칫 중국에서 들어온 것인가 하는 혐의를 뒤집어쓰기 딱 알맞은 조건인데.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그는 산에 있을 때 방 안에 벽지 대신 훈민정음 해례본을 붙여놓고 매일 들여다 보며 판소리의 발성과 장단 원리를 깨달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간절함 덕에 나날이 지식과 경험이 쌓이고 머릿속에 자신감과 할 말이 넘치게 되었고 마침내 책을 쓰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고리타분한 이론가나 꼰대스러운 예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는 예감은 그의 남다른 집필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판소리에 아이폰이라니! 그는 컴퓨터에도 익숙한 세대가 아니라 글쓰기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우연히 스마트폰에 메모 어플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쓰고 싶은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꾹꾹 자판을 눌러 글을 썼다는 것이다. 글쓰기부터 전통과 퓨전의 만남이요, 배일동과 스티브 잡스의 만남이었다. 


이는 ‘음양오행이나 동양철학들은 절대 관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학문이 아니다. 우주의 엄연한 질서를 인간의 상세한 관찰로 이루어낸 위대한 자연법칙들이다. 현대사회에서도 그러한 철학들이 문화생활의 원리에 얼마만큼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그의 퓨전 철학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아무튼 스마트폰 글쓰기에 맛을 들여 허리가 비뚤어질 정도로 글을 생산해내느라 의사한테 야단까지 맞았다는 배일동은 마침내 우리 문화사에 의미 있는 족적이 될 [독공]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 이후에 판소리의 실제 이론을 다룬 제 2권이 곧 나올 예정이다. ‘명창’이라는 하드웨어적 자산에 ‘공부’라는 소프트웨어적인 추진력을 겸비한 그의 행보가 사뭇 궁금해진다. 그나마 우리 곁에 [독공]이라는 책이 방금 도착해서 여러모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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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텀닷 초밀도 화질로 

보이지 않았던 움직임 

숨어있던 땀방울까지 - 


새로 나온 S사의 SUHD TV광고를 보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수천만 원을 주고 새 TV를 사서 저렇게 초밀도로 봐야할 일이 과연 존재하는 걸까.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것들도 믿지 못해 다시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확인하려 들면서 말이다. 


특정 회사의 제품이나 광고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오히려 매우 잘 만든 광고다). 다만 매 순간 첨단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소비자의 삶이 어쩐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짧은 글을 남겨보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흑백TV를 보던 때 상상력이 더 풍부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기술의 발전이나 삶의 풍요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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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을 두 번 보았다. 우리 부부는 시간이 안 맞아서 이 영화를 따로따로 보았는데 어느 날 다시 극장에서 함께 보고 작품에 대해 서로 얘기해 보자는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조조를 봄으로써 그 약속을 이루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곡성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마을이 있다. 얼마 전 마을로 들어온 외지인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고 귀신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다가 마을 경찰인 종구의 딸 효진이가 병에 걸려 이상한 짓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상하게도 왜, 라고 묻는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아니, 그걸 설명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는 세상 모든 일 중 ‘왜?’ 라는 질문에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음을 얘기하는 듯하다. 대신 ‘어떻게’에 대한 얘기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왜 효진인가, 가 아니라 효진이가 선택된 이후에 종구는 딸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일광은 어떻게 어떤 굿을 했으며 무명은 마을을 지키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가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의 포인트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이는 종교와 샤머니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도 한다. 다 맞는 말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왜?’라는 전자의 질문이 그럴듯한 담론들을 만들어낸다면 후자의 ‘어떻게?’라는 질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외지인이 왜 곡성에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왜 사람들을 죽이는지도 모른다. 일광이 외지인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최선을 다했나,에 이르면 스토리와 디테일들은 단박에 날개를 달고 끝없이 달려 나간다. 


나홍진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주된 이야기는 치열하고 치밀하게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어느 가장에 대한 이야기다. 2시간 내내 전력을 다해 방어하는데 들어오려고 하는 존재가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황이 가장 무섭다.”라고 했다. 영화는 일광이나 무명이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야기의 끝까지 간다는 데 진짜 묘미가 있다. 심지어 끝나고 나서도 좋은 편과 나쁜 편의 구별이 희미하다. 어쩌면 사건의 중심에 있으며 동시에 최대 피해자인 종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맨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도 “걱정 마, 아빠가 다 해결 할게.”라는 하나마나 한 맥빠진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다. 난 이렇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열려있는 결말’이 좋았다. 

그래서 이건 일종의 거대한 ‘ 사기극’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나 예고편에도 나오고 일광도 얘기하던 그 ‘낚시질’ 말이다(미국에도 있다.J.J. 에이브람스라고, 거대한 '떡밥'의 일인자). 만약 당신이 사기꾼을 만났다면 그가 왜 사기꾼이 되었는지를 묻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대신 어떤 사기를 어떻게 쳤는지 물어보는 게 옳다. 아마 그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질문에 더 신이 나서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양껏 풀어놓을 것이다. 물론 진짜 사기꾼이라면 나중에 당신까지 속여먹고 튈지 모르니까 그 전에 얼른 차버려야겠지만, 그게 나홍진 같은 영화감독이라면 기분 좋게 한 번 속아줘도 좋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재미 없는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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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브레이크]의 스코필드를 석호필이라고 부르고 가수이자 제작자인 토니 안을 '토 사장'이라 부르듯이 우리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를 '파 교수님’이라 부른다. 이미 트위터의 유명인사이고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가 이렇게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민주사회에 대한 논리정연한 생각을 두루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신작 에세이 [미래시민의 조건]은 3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는 언어학자이자 교육자인 실천적 지식인 파 교수가 헬조선에 보내는 따뜻한 충고다. 일본어를 전공하던 학생이었던 로버트 파우저는 1982년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후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13년을 지내며 교토대와 서울대 등에서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를 번갈아 가르쳤다. ‘한국인의 따뜻한 정과 라틴적 감수성’에 매료되어 어느덧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던 그는 오랜만에 다시 돌아와 변해버린 한국에 놀란다. 그가 처음 봤던 활기차고 역동적인적인 대한민국은 어디 가고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단어가 날아다니는 체념의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꼭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촌에 한옥을 사서 다시 짓고 지역 공동체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기도 하던 그는 어느날 문득 서울대를 그만두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떠나면 더 잘 보인다고 했던가. 29년만에 고향에 돌아가 한국생활을 반추하던 파우저 교수는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민주주의'로 귀결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이다. 

대한민국은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도 높게 나왔고 GDP도 2만달러에 달하는, 심지어 '2050클럽'에 속하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나라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큰 원인은 사회 시스템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우선으로 여기는 '각자도생'의 생활방식이  온 나라에 팽배하게 되었다. 파우저 교수는 시스템 불안의 원인으로 혈연, 지연과 같은 '사회적 자본'에 집중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주목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스펙을 많이 쌓고 이용할 수 있는 연줄은 다 걸어서 스스로 안전망을 만들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파우저가 어떻게 서울대 교수가 된 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들의 작용이었다. 로버트 파우저는 한국 학계에서 그리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뭘 시켜준다고 해서 금방 크게 자라 세력화 될 염려가 없는 인물인 것이다. 더구나 그가 '첫 외국인 국어교육학과 교수'가 되면 대외적으로 서울대 이미지도 올라갈 수 있다. 꿩먹고 알먹고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파우저 교수가 우리 사회를 더 사심(?) 없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왜 '민주주의'인가. 파우저 교수는 언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이다. 언어는 단지 말이나 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방식 등을 그대로 담고 있다. 따라서 언어에 능하면 그만큼 통찰력도 늘어나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는 모국어 하나만 하면 흑백의 세상을 사는 것이고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면 컬러 세상을, 세 개 이상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 3D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는 그가 수평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한국사회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큰 덕목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일본이나 미국이 나쁘고 한국은 무조건 좋다, 는 식의 단순무식한 사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사라진 활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데 이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 파우저 교수는 책의 첫머리부터 '시민'에 대해 이야기 한다. 중요한 모든 것들이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애초부터 한국어로 씌여졌는데 가만히 읽다보면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시민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훓어보는 세계사와 근대사는 마치 중고등학교 교과서처럼 짧으면서도 요점적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중간중간부분은 인간적인 체취가 넘친다. 맨 뒤쪽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글도 있는데 막상 그의 생애와 관심사에 관해 우리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미래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비전은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현황을 보고 제시한 비전과 비교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논의할 수도 있다. 미래 비전은 사실 또는 진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며, 따라서 이 책은 미래에 대한 희망 이야기인 셈이다.



파우저 교수는 책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에 어떻게 하면 '헬조선'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의 단초들을 던져준다. 지금처럼 각자 스펙을 쌓아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갑자기 메시아가 나타날 리도 없다. 각자의 올바른 생각과 참여를 통해 시민의식을 깨우는 것만이 방법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좀 더 발전적인 공동체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파우저 교수는 이를 '국민'의 사고에서 공동체 주인으로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장으로 역설한다. 


 '국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가 된다'라는 장 자끄 루소의 말이 있다. 곧 지방선거가 다가온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 시기에 로버트 파우저 교수 같은 지식인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얇은 책이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무게는 만만치가 않다. 일독을 권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읽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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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바빠 아내와 함께 일찍 출근을 하다가 오늘은 좀 여유가 있길래 아내 먼저 출근시킨 후 혼자 침대에 누워 단편소설을 하나 읽고 회사로 갔다(광고 프로덕션 특성 상 일반 직장인보다 출근시간이 좀 늦다). 



김연수의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짧은 단편이다. 전에 분명히 읽었는데 ‘읽었다는 기억’만 나고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전엔 그래도 기억력이 좀 좋았는데 이젠 정말 바보가 되어간다. 2009년 3월, 소설가인 주인공이 세브란스병원 암병동 복도에서 정대원이라는 노인을 만나는 장면을 읽으니 어렴풋이 소설의 도입부를 읽은 기억이 났다. 노인이 쓴 소설 ‘24번 어금니로 남은 사랑’이라는 제목을 읽으니 그가 들려준 어금니의 비밀도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어금니를 뽑고 나와 기념사진을 찍다가 자살을 기도한 이야기. 자신의 이를 뽑아주고 사진을 찍어준 간호사와 몇 달 간 동거를 했던 이야기. 그녀가 어느날 볼펜 한 박스를 사다 주며 그 사연을 소설로 쓰게 했던 이야기. 그가 세브란스에서 작가와의 만남 이후 그 이야기를 빨간색 펜으로 써서 보내왔던 뒤늦은 원고. 그리고 마침내 그해 5월 23일 아침, 정대원이라는 원로 소설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기사. 동시에 갑작스러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알리는 친구의 전화. 소설가가 찾아갔던 대한문 앞의 조문행렬.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모습.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볼펜에 대한 이야기는 김연수가 쓴 다른 책 <소설가의 일>에서 주장하던 그의 창작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책을 다시 펼치기 전까지는 이 모든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던 것은 아마 책을 ‘천천히’ 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어느덧 나는 책을 천천히 읽으며 곱씹는 즐거움을 읽어버리고 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는 좋은 단편들이 많다. 김연수는 자신의 경험이나 실제 있었던 일을 소설에 녹이면서도 핍진성을 잃지 않는 작가다. 첫 번째 실린 소설 ‘벚꽃 새해’에 나오는 영화 <몽중인>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이 소설에 나오는 정대원이라는 소설가도 실제로 이름과 작품이 존재한다. 알면 알수록 재밌어지는 이 모든 이야기를 그냥 휘리릭 읽어버리고 곧바로 잊기엔 너무 아깝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다시 읽음으로써 비로소 김연수의 소설은 나의 것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좀 천천히 읽자. 김연수처럼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못 누리더라도 책 읽는 이들의 한 가지 즐거움, 즉 천천히 음미하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의 기쁨은 좀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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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극장에 들어가 좌석에 앉을 때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을 하는 편이다. 방해금지가 아니라 왜 비행기 모드냐고? 비행기를 탈 때 처음 이 버튼을 눌렀었는데 평상시에도 비행기 모드로 전환만 해놓으면 전화벨이나 문자 알림음, 또는 진동이 울리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아무래도 큰 사건이다. 출장이 잦은 비즈니스맨이라도 그렇다. 그것에 비하면 '비행기 모드'를 누르는 건 매우 가벼운 행위다. 그런데 대한항공 광고팀은 그 가벼운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로 비행기를 타는 것만이 아니라 비행기 모드로 전환만 하는 사소한 행동으로도 얻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 종일 쉴새 없이 몰입을 방해하는 스마트폰의 알림음들, 수많은 콘텐츠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작은 비행기 버튼'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광고 소재였다. 심지어 항공사들이 이 기능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그런데 대한항공팀이 멋지게 그걸 선점했다. 탁월한 선택이요 기획력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카피도 좋다. 


이 작은 비행기로 

당신의 일상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대한항공은 바랍니다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캠페인 이후로 대한항공은 정말 광고를 잘 한다. 지난번 '게스트 하우스 인 프랑스' 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에 '나는 비행기를 탑니다'로 다시 멋지게 돌아왔다. 그런데 이렇게 광고를 잘 하면 뭐하나. 대한항공의 오너와 그 딸들이 앞다투어 진상을 떨며 애써 올려놓은 이미지를 깎아먹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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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탈영병 얘기가 뉴스에 나오면 사람들은 한숨부터 내쉰다. 아니 어쩌자고 탈영을 해? 도대체 쟤는 무슨 생각에 저랬을까. 이해를 할 수가 없네. 물론 나도 똑같은 소리를 한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총을 들고 탈영을 하면 잘해야 다시 끌려가 징역을 오래 살거나 아니면 검거현장에서 사살되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물론 본인에게는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애인이 변심을 했거나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고참 새끼가 있거나. 그러나 제3자는 죽었다 깨나도 그 이유를 모르고 이해도 못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그런데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심정을 헤아려 보는 방법이 뭐 없을까. 기자 또는 학자가 나와서 그 사실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 우리는 소설로, 영화로, 또는 연극으로 그 현장에 다시 들어가 보는 경험을 선택한다. 그러면 몇 줄로 요약될 수도 있었던 앙상한 사실은 픽션이라는 드라마 장치를 통해 육화되고 비로소 사람들에게 사건 밑에 깔려있던 입체적인 진실을 들려준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라는 이 직설적인 제목의 연극은 탈영병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2015년 현재 모 군부대에서 소총을 들고 탈영한 말년병장. 그 놈은 제대 한 달을 남겨두고 왜 탈영을 한 것일까. 연극은 현재의 탈영병 이야기로 시작해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의 반군들, 그리고 1944년 일본 오키나와의 가미카제 특공대로 지원했던(사실은 끌려간 것이지만) 조선의 젊은이들 얘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2010년 서해 백령도의 초계함 안으로 들어간다.

 

명백히 천안함 침몰사건을 연상시키는 백령도 초계함 챕터는 생일을 맞아 동료들로부터 초코파이를 선물 받았던 병사 이야기, 돌 지난 육지의 아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취사병 이야기, 매번 지각을 해서 매를 맞던 고문관 이야기 등등 병사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통해 그들이 군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라크 병사들이나 탈영병, 가미카제 병사들의 이야기를 돌아 다시 이들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아까 관객에게 들려주었던 각자의 대사들을 똑같이 한 번 더 반복하게 한다. 물론 그냥 반복은 아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초계함 안에서 사망한 그들은 자신의 대사가 끝날 때쯤 나타난 의사와 간호사들에 의해 머리 위에 검은색 직사각형 삼베봉투를 쓰고 그대로 서 있게 된다. 그렇게 저마다의 분분했던 사연들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일제히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 저마다의 사연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검은 봉투가 씌어지는 순간 로봇처럼 멈추어 설 때 코를 훌쩍이던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눈물을 뿌린다. 나도 눈물이 나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젊은 영혼들의 심정이 가슴으로 뜨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공감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연이 잘 짜여진 연극의 플롯과 대사, 그리고 절제되면서도 정확하고 열성적인 연기들을 통해 되살아 나면서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곁에서 일어났던 일임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반복해서 일어날 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로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배우 이원재를 비롯해 캐스팅 일순위에 들어간다는 명배우들이 열 일을 제쳐두고 이 연극에 몰려든 것은 극을 쓰고 연출한 예술감독 박근형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나도 박근형이라는 이름 때문에 금요일의 바쁜 일정을 가까스로 소화한 뒤 저녁을 굶은 채 남산예술센터까지 달려 왔으니까. 박근형은 전작 [개구리]에서 전직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창작지원사업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다. 이 작품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바람에 정부에서 주는 창작자원금 후보에서 밀렸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국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관객들은 전회 매진이라는 뜨거운 성원과 집단지성을 통해 이 연극의 의의와 작품성을 인정해 주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가지는 고유한 기능인 픽션을 만들어내고 믿는 능력때문이라고 했다. 픽션은 거짓말이지만 진실을 밑천으로 하는 핍진성 있는 거짓말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끌려가 비행기 안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자폭했다라거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초계함에 타고 있던 46명의 병사들 전원이 사망했다는 건조한 문장으로는 도저히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진실들은 픽션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우리들의 지성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연극을 보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이번 주말까지만 상연한다. 그러나 다시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놓치지 말고 꼭 예매를 하시기 바란다. 10월에는 일본 도쿄에서도 무대를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놓치기 너무 아까운 연극이라며 티켓을(그것도 배우할인 가격으로!) 확보해 준 배우 이승연 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의 신작 발표 행사 때문에 아깝게 이 연극을 놓친 아내 윤혜자 여사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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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결혼이라는 걸 안 하고 살 줄 알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결혼생활이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또 혼자 살아도 별로 외롭거나 비참한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있는 게 좋았다. 이게 대인기피증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게,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거나 노는 것도 참 좋아하는데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혼자 소파에 늘어져서 다리 까딱이며 신문을 보거나 멍때리고 있는 나의 모습이 그려지고 이내 그 상태가 몹시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예쁜 여자가 혼자 우리집에 놀러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날 밤 어찌어찌 잠자리를 가질 때까지는 좋았는데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근데 쟨 집에 안 가나?’라는 한심한 생각이 나도 모르게 뱃속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이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남들이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고 상대를 만날 때도 나는 여자들에게 객적은 농담이나 픽픽 날리고 미래에 대해 얘기하기를 꺼리는 한없이 가벼운 연애상대나 그냥 '아는 오빠'로 비춰지고 있었다.


그래, 가끔 이렇게 연애나 하며 살지 뭐, 결혼은. 이렇게 나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나름 정리하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몇 개의 우연이 겹치는가 싶더니 마치 교통사고 당하듯 생각지도 않게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무엇에 홀린듯 사귀고 동거하고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상하게 아내와 있으면 힘들거나 지겹지 않고 '혼자 소파에 늘어져서 다리 까딱이며 신문을 보거나 멍때리고 있는 나의 모습'도 더 이상 그려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한다. 어떤 얘기를 하냐고? 많은 커플이 그렇듯 우리도 '오바마의 역사적인 쿠바 방문'이나 '더민주 김종인 대표가 어떤 판단을 내릴까' 같은 심오한 얘기는 잘 나누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회사에서 있었던 소소한 얘기나 TV 프로그램 얘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자잘한 뒷담화 등을 나눈다. 그리고 서로 힘든 얘기를 거침없이 나눈다. 이게 중요하다.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일수록 화를 자주 내거나, 무서워하거나, 무감각해지는 등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감정들을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에게 표현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심리학자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슬픔이나 외로움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그런 걸 모두 말한다.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멍충한 짓을 했는지, 얼마나 창피한지. 아무리 바보 같은 얘기를 해도(하다못해 출근하다 바지에 똥싼 얘기를 해도)...그녀는 다 받아준다. 다 받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나를 부자로 만든다.


(*사진의 전당포는 총신대입구역 사당우체국 근처에 지금도 실제로 있는 가게입니다. 예전에 침맞으러 갔다가 찍어놨던 사진인데, 이 글과 잘 맞는 거 같아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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