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레이먼드 카버나 윤대녕의 소설을 지금 열 다섯살 중학생이 읽는다고 생각해 보자. 뭐,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들이니 읽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읽는 것이 아니다. 뜻도 모르고 그냥 눈으로 스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카버의 짧은 소설들이 우리 인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행위라는 것을, 여행만 떠나면 자살 직전일 것 같은 여자들을 만나 카페에서 술을 마시거나 여관에서 같이 자는 주인공의 여정이 인생의 쓸쓸함과 신산함을 돌려 말하는 글이라는 것을 열 다섯살 나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그런 존재다. '열 두살은 열 두살을 살고 열 여섯은 열 여섯을 살지’라는 김창완의 노래도 바로 그런 얘기일 테니까.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이 거의 없는데도 '미성년자 관람불가’가 된 것은 미성년이 봐서는 아무런 의미도 느낄 수 없고 재미도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판단과 배려 덕분이다.  에로나 포르노만 성인영화가 아니다.  진짜 성인영화란 이런 것이다. 어른들이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 그런 이데올로기. 


홍상수의 작품들을 즐겨 본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야기할 것이다. 또 그 얘기야? 그렇다 또 그 얘기다. 이번에도 영화감독이 주인공이고 그림을 그린다는 젊은 여자가 하나 나온다. 둘은 우연히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술에 취해 서로 약점을 드러내고 속내를 탐색하다가 치사하거나 어이 없는 공방전이 몇 차례 지나가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런 지리멸렬한 이야기로 감독은 이번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을 탔고 정재영은 남우주연상까지 탔다. 어떻게 그런 결과가 가능했을까. 


수원에 GV 및 특강이 있어서 내려 온 영화감독 함춘수는 주최측의 착오 때문에 하루 일찍 오는 바람에 행사 전날 숙소를 정해두고 하릴없이 화성행궁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후줄근한 청바지와 오리털 파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기보다는 돈 없고 시간은 많은 소외된 지식인의 모습에 가깝다. 고궁의 따뜻한 햇빛이 내려쬐는 툇마루에서 잠깐 졸던 춘수는 그곳에서 바나나우유를 마시고 있는 젊은 여자 희정을 목격한다. 뭐 하세요, 라고 거의 본능처럼 남자가 말을 붙이고 우유 마시는데요, 라고 여자가 대답을 하고. 어렵게 어렵게 말을 붙인 두 사람은 남자가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여자가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하면서 급반전을 이룬다.

커피를 마시러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작업실로 가게 되고 거기서 그녀의 그림을 본 남자는 “희정 씨는 모르고 들어가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하는 것 같아요”라는 애매모호로 칠갑을 한 칭찬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해가 지자 자연스럽게 스시집으로 가서 소주를 마신다. 원래는 치킨집에 갈 계획이었는데 춘수가 즉흥적으로 스시집 앞에 멈추는 바람에 희정이 그집으로 들어가자고 한 것이다. 

단 둘이 술을 마시며 남녀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남자는 계속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여자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애간장을 태운다. “아유, 제가 무슨…”이라는 입에 발린 지식인의 겸손을 몸에 두른 듯한 정재영의 연기도 그렇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인생의 맛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김민희의 자연스러운 목소리와 연기도 일품이다.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음주 장면은 모두 실제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배우들은 진짜 술을 마시고 그 술에 취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저 배우들은 술이 좀 약하네. 보통 홍상수 영화에는 테이블에 소주가 대여섯 병은 늘어서 있는데 아까 걔네들은 세 병밖에 없었잖아.”

그렇다. 세 병이든 다섯 병이든 중요한 건 배우들이 정말로 술을 마시며 연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건 대사를 정확하게 외우고 연기를 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훌쩍 넘어서는 연출법이며 연기 테크닉이다. 배우들은 그날 아침에야 감독이 쓰기 시작하는 시나리오를 받다들고 연기를 한다. 물론 그 전에 감독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이 영화가 어떤 컨셉과 얼개로 진행이 될 것이고 어떤 소재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건 알지만 1부와 2부가 어떻게 미세하게 다를 것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영화를 찍게 된다. 그건 감독도 닥쳐보기 전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천재의 자신감이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는 독단이요, 파격이다. 아무튼 이번엔 술이 약한 배우들이 술 영화를 찍느라고 고생을 좀 했겠다. 나중에 들었는데 정재영은 정말 스시집 장면을 찍고 나서 기절하듯 쓰러져 잤다고 한다.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희정이 깜빡 잊고 있었던 파티에 함께 가게 되고 거기서 최화정, 기주봉, 서영화 등을 만나게 되는데 이미 술이 많이 취했고 또 깐깐한 최화정에 의해 춘수가 일찍 결혼을 한 유부남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계에서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것이 모두 밝혀진다. 화가 난 희정은 다른 방으로 가서 책상에 업드려 자고 춘수는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채 숙소로 돌아간다. 다음날 GV때 사회자이자 평론가인 유준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춘수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마구 그 평론가를 욕하게 되고 마침 엉뚱하게 자신의 시집을 들고 찾아온 서영화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된다. 여기까지가 1부다.

2부는 똑같은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펼져친다. 이건 <오!수정>이나 <강원도의 힘>에서부터 계속 되던 '홍상수표' 전개방식이다. 그때는 정보석이 “포크예요”라고 하다가 “스푼이에요”라고 바뀐 것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후로 시간대를 마구 뒤섞어본다든지(<자유의 언덕>) 시점이 바뀌면서 드러나는 코미적인 상황들을 보여준다든지(<우리 선희>) 하는 변주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홍상수의 '반복과 차이’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전에는 그런 것을 통해 지식인의 위선, 남자들의 찌질함, 여자들의 빤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홍상수 영화가 재미 있지만 불편하다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홍상수는 더 여유로워지고 깊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 리뷰를 쓰려고 다시 살펴보니 제목의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왜 그런가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홍상수 감독 왈 ‘제목이 너무 길어서’ 였다고 한다. 제목의 의미를 찾아 헤맨 사람들에겐 다소 김이 빠지는 설명일 수 있겠다. 그런데 난 그게 이 영화를 이해하는 작은 팁이 될 수도 있다 싶었다. 

홍상수 영화가 세상의 찌질함, 남자들의 유치함을 연료로 삼고 있는 코미디 영화라는 점은 데뷔적부터 지금까지 여전하지만 그 걍팍함은 많이 사라졌다. 거짓말을 일삼는 춘수도 2부에서는 더 솔직해지고 희정도 그런 춘수를 탓하기는커녕 나중에 술에 취한 춘수가 선배 언니들 앞에서 팬티까지 내리는 추태를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도 오히려 귀엽게 여긴다. 거짓말을 하든 참말을 하든 애초부터 세상에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이건 1부와 2부가 사뭇 다르게 진행되지만 큰 그림으로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2부에서 둘이 즉흥적으로 택시를 타고 강원도로 놀러가기로 의기투합하지만 잠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 얘기가 흐지부지 되어 없었던 얘기처럼 취급되는 장면도 그렇다. 둘이 택시비로 십만 원을 내고 강원도까지 가든 안 가든 뭐 그리 달라질 일이 있겠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홍상수 영화는 절망도 희망도 없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런데 그 흘러감이 인위적이지 않고(우연을 질료로 삼는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쓴맛단맛을 아는 통찰력이 스며있기에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른한 술자리와 반복되는 헛소리들 속에서 우리들의 인생이 의외의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홍상수의 영화들은 흥행과 상관 없이 또 만들어질 것이고(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부터 전원사라는 영화사를 차려 자유롭게 영화를 찍고 있다)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도 또 다른 재미와 의미가 피어날 것이다. 또 어디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이번엔 수원이었지만 다음엔 제천일 수도 있고 부산일 수도 있다. 그게 어디면 어떻겠는가. 어디나 사람은 살아가고 있고 이야기는 만들어지는데. 우리 곁에 홍상수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그는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발명하는 발명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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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코끼리가 그려진 에버노트라는 앱을 본 적이 있는가. 기억력이 좋은 동물로 알려진 코끼리를 사용한 이 앱은 ‘모든 것을 기억하라( Remember Everything)’라는 모토처럼 세상의 모든 기억을 향상시키겠다는 비전을 갖고 태어난 기업이자 디바이스의 이름이기도 하다. 언제든지(Ever) 기록하고(Note) 자신만의 콘테츠를 언제까진(Ever) 저장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 혹은 컴퓨터에서만 쓸 수 있는 메모 어플리케이션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노트다. 


나도 에버노트 사용자다. 그런데 굉장히 초보적인 사용자다. 내가 에버노트로 하는 일이라고는 길을  가다가 또는 사무실에서 멍때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단어나 문장을 재빨리 기록하고 나중에 그걸 찾아 다시 새로운 글이나 아이디어로 발전시키는 것뿐이다. 때로는 신문 칼럼이나 인터넷 기사를 스크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거의 다다. 나는 하위 폴더들을 생성해 정보를 분류하지도 못하고 태그 기능으로 데이터를 검색하지도 못한다. 이 모든 게 무식하고 게을러서 그렇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번에 홍순성 소장이 쓴 에버노트 책의 제목 ‘프로들의 에버노트’라는 제목을 짓게 되었다. 홍 소장은 우리나라에서 에버노트에 가장 정통한 스마트 워킹 및 정보관리컨설턴트다. 나는 몇 년 전 아내의 추천으로 홍 소장이 진행하는 에버노트 유료강좌에 한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를 내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워낙 컴맹 수준인 나는 다름 참석자들이 다 이해하는 애버노트 기본 사용팁을 거의 숙지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스마트 워터가 아닌 나는 그저 메모만 하는 것으로도 에버노트 사용에 만족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로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 간간히 안부를 묻게 되었고 사람 좋아하고 또 사람들끼리 연결해 주기 좋아하는 홍 소장 덕에 나의 힘으로는 만나기 힘든 직종의 몇몇 전문가들과 몇 번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예전부터 인복이 많은 나의 행운 덕분이다.

얼마 전 홍 소장이 새로운 책의 이름을 공모한다는 글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렸다. 책 제목의 조건은 일단 짧을 것(두 단어면 좋겠다), 그리고 ‘일 잘하는 사람들의 에버노트’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을 것 등이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댓글로 책 제목 응모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냥 지나치기 싫어서 ‘프로들의 에버노트는 어떠세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며칠 후 홍 소장으로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일단 내가 응모한 ‘프로들의 에버노트’를 후보작으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종 결정 전까지 몇 가지만 더 아이디어를 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제목은 없을까, 조금 더 아이디얼한 것은 없을까 하는, 모든 저자들의 욕심이었다. 

마침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주말 동안 아이데이션을 좀 더 해서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홍 소장님, 책 제목 관련 메모입니다. 짧게 생각해보면 ‘프로들의 에버노트’ 정도가 제일 나은 거 같구요, 조금 더 긴 문장이 되도록 생각해 보면 ‘에버노트로 성공하기’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에버노트 습관’ 같은 패러디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Good job with Evernote’처럼 아예 영어를 쓰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봤고 ‘모든 것을 기억하라’같은 에버노트의 모토를 생각하면 ‘내가 만드는 보물창고, 에버노트’ 같은 의미 확장도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두 단어라는 제약 때문에 쉽지가 않더군요. 어쨌든 제가 생각한 것들은 이 정도입니다. 휴가 중인데 나름 바쁘네요.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책 제목이 ‘프로들의 에버노트’로 전해졌다는 소식이 왔다. 그리고 책 제목 때문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잘 팔려서 곧 2쇄를 찍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엉겁결에 지은 제목이 사람들에게 많이 전달된다니 반갑고 기쁘다. 그리고 들국화컴퍼니에서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다시 행진’이라는 들국화 콘서트 제목을 생각해 낸 나의 아내처럼 나도 ‘프로들의 에버노트’라는 제목을 지었다는 생각에 일말의 뿌듯함도 느껴졌다. 그저께 월향 이태원점에서 만난 홍 소장이 방금 출간된 ‘프로들의 에버노트’ 두 권을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셨다. 이왕 이렇게된 거, 책을 열심히 읽고 앞으로는 좀 더 프로처럼 일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내 티스토리 블로그 이름도 '편성준의 생각노트'다. 물론 이건 기타노 다케시가 펴낸 책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긴 하지만. 


(조금 전 샤워하다가 생각난 카피를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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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좀 우스웠던 것 중 하나는 미스코리아나 수퍼모델 선발대회 같은 미인대회를 할 때마다 출연자나 사회자가 결론처럼(또는 기획의도처럼) ‘결국 내면의 아름다움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를 반복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수영복 심사일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아니,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면서 왜 영혼과 별 상관 없는 쭉쭉빵빵 몸매를 뽐내는 수영복 심사 때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것일까. 하긴 나도 아름다운 몸매가 좋긴 했다. 일단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에는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기 힘들 것 같았고 이쁜 여자와 못 생긴 여자 중 누가 더 착할 것 같냐고 물으면 왠지 이쁜 여자일 것만 같은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일수록 주인에게 더 사랑받는 이치나 들판에 핀 꽃 중에서도 예쁜 꽃들이 아이들에게 먼저 꺽이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진리처럼 보였다. 보기 드문 추남이었다던 소크라테스도 만약 헐리우드 배우인 브래드 피트나 데인젤 워싱턴처럼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쉽게 독배를 마시고 죽어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만 진지한 자리가 되어도 무조건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교조주의를 내게 강요했고 나도 자발적으로 그들의 거짓 정서에 굴복하는 일반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오늘 본 백감독의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제목 그대로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품고 있는 아이러니가 얼마나 큰가.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심한 부담감을 안고 들어가는 불리한 프로젝트였다. 사실은 백종열 감독이 장편상업영화 데뷔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했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었다. 지난 20여 년간 광고계나 뮤직비디오 업게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별 실패 없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백종열 감독이 왜 하필 인텔인사이드와 도시바가 만들어서 이미 '깐느광고영화제 그랑프리'라는 단물을 다 빼먹은 유명 콘텐츠에 도전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더구나 6부작으로 만들어진 기존의 광고영화는 ‘매일 밤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바뀐다’라는 빅 아이디어가 이미 알려질대로 다 알려지고 한글자막까지 나돌던 유투브의 인기 콘텐츠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예전 왕가위의 영화를 한 콤마 한 콤마 그대로 베껴 재기불능의 상태가 될때까지 욕을 먹었던 김의석 감독이나 히치콕의 [싸이코]를 컷바이컷으로 그대로 모사해 비웃음을 샀던  브라이언 드 팔머 꼴이 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그런 여러가지 구차한 걱정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극복해 버린 특이한 경우라고 해야할 것이다.  원작처럼 주인공 우진은 아침에 눈을 뜨면 나이, 성별, 인종에 이르기까지 먀번 전혀 다른 사람으로 깨어난다. 어떤 사람이 될지 ‘미리보기’ 따위는 존재하자 않는다. 그것은 ‘절대고독’을 전제로 하는 잔인한 운명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 것은 '관계를 이루는 존재’라는 점 때문인데 열여덟 살 이후로 우진에게 지속적인 관계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절친인 상백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진의 삶에 어느날 이수라는 여자가 들어온다.

영화는 마술적이고 동화적인 기본 설정답게 생활의 냄새는 최대한 지우고 두 사람의 로맨틱한  상황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따뜻하고 착한  아날로그적 분위기로 일관한다. 이는 무려 스물한 명에 달하는 우진 역의 남녀 배우들이 그들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매일밤 새로운 얼굴을 맞아야 하는 우진이라는 캐릭터에 충실하게 복무한 까닭이기도 하고 가구점이나 가구 디자이너라는 나무 질감이 많이 등장하는 인간적인 직업설정이나 공간, 소품배치 등에도 기인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훗날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뭔가 작고 흐뭇한 에피소드들이 자꾸만 생각난다면 그 공은 아마도 여주인공 이수 역을 맡은 한효주 덕분일 거라고 생각된다. 아름답지만 독하거나 격정적이지 않고, 스물아홉 살의 젊은 여자지만 마치 누나나 여동생처럼 나의 이야기를 찬찬히 잘 들어줄 것만 같은 여자. 이수는 그런 넉넘함을 표정과 제스추어에 탑재하고 있는 흔치 않는 캐릭터였다. 더구나 우진의 비밀을 알고 한참 사귀다가 너무 힘들어 헤어지려는 마음을 먹었을 떄(이수의 언니가 우진이 만들어준 의자에 앉아 “이건 너무 니 싸이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이수를 안아줄 때)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연기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물론 우진의 이야기를 아버지 세대로까지 확장시킨 후반부나 ‘내면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예쁘고 잘 생긴 주인공들 때문에 정신과 의사까지 동원해 틈만 나면 설교하듯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반복 강조하는 후반부는 좀 성기고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이건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설정에서부터 관객과 감독 배우 모두 서로 이해하고 들어가는 로맨틱 코미디 아닌가. 더구나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이 기본 아이디어가 모두 공개된 콘텐츠이기도 한데 뭐 더 새로운 것을 그렇게 바라나. 

이미 나이가 든 우리 커플은 초대형 팝콘 박스와 음료수컵을 든 젊은 커플들에 밀려 맨 오른쪽 자리로 피해가야만 했다(영화 보는 도중 옆에서 우적우적 팝콘 먹는 소리가 정말 싫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러 온 커플 중에 아직 손을 못 잡은 커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풀어져서 서로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맥주를 한 잔 걸치고 처음으로 같이 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는 그런 종류의 공감을 가진 작품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라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두 시간 동안 소소한 에피소드에 웃음짓거나 안타까워 하다가 결국 기분 좋은 추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영화. 그래서 친구들에게 추천하게 되고 비록 평론가들은 낮은 평점을 부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극장에 찾아가기 위해 시간을 비우는 영화. 원래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은 클라크 케이블이 나왔던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어젯밤에 생긴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늘 그런 이유로 사랑받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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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그림을 그리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작가인 조덕현이 어느 날 인터넷에서 조덕현이란 이름을 발견한다. 영화배우 조덕현이다. 작가 조덕현은 배우 조덕현을 만나 가상인물 조덕현(1916~95)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 일제시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조덕현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960년대 한국 영화계도 전전하다가 결국 독거노인으로 쓸쓸하게 죽는 최후까지. 이야기 구성에는 소설가 김기창이 합류했다고 한다. 그걸 연극무대처럼 만들어 전시를 한다. 오늘 아침에 신문에서 읽었다. 이런 게 스토리텔링이지. 재밌을 거 같다. 10월 25일까지란다. 일민미술관. 보러가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2145275&code=9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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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연작 소설 [맏물 이야기]를 이틀 간에 걸쳐 재미있게 읽었네요. 페이스북 간서치의 읍장님께서 예전에 추천하신 걸 잊지 않고 적어놓고 있다가 휴가 막판에 사서 읽게 된 거죠.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몇 년 전 [용은 잠들다]를 시작으로 해서 [모방범] 이후에도 꽤 많이 읽은 편인데 막상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녀의 역사 소설은 처음입니다. '맏물'은 한 해의 맨 처음에 나는 과일, 푸성귀, 해산물 따위를 일컫는 말이죠. 작가는 이 식자재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각각의 사건들을 좀 더 서민적이고도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미미여사 소설의 특징은 살인 사건 등이 등장하는 장르물인데도 따뜻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맏물 이야기]는 '에도시대'라는 특정 시간대에 벌어지는 일들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러운지. 에도 막부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삼장군 시대의 일이라죠. 마치 [두 도시 이야기]나 [프랑스 중위의 여자], [핑거 스미스]의 배경이 되는 빅토리아 시대처럼. 당연히 기록과 상상력에 의지해 글을 썼을 텐데 그 당시의 음식들은 물론 공동주택과 골목골목의 풍경, 옷차림, 바느질에 이르기까지 마치 방금까지 그곳에서 살다 나온 사람처럼 묘사가 자연스럽고 정겹습니다.


저는 아홉 편의 단편 중에서도 <천 냥짜리 가다랑어>와 <원한의 뿌리>가 특히 좋았습니다. 아마도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스며 있거나 어긋나 버린 인간관계에 대한 회한이 스며 있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는 <천 냥짜리 가다랑어>에서 모시치가 생선장수의 아내에게 냅다 빰을 얻어맞는 장면에서 뭉클해져 하마터면 눈물을 떨굴 뻔했습니다.


이 아홉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이름은 모시치인데 직업이 '오캇피키'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느 읍의 파출소장 정도나 될까요. 그에겐 두 명의 부하가 있습니다. 어리고 성급하지만 동작이 재빠르고 밥을 많이 먹는 이토키치, 그리고 덩치가 소처럼 크고 둔중하지만 침착하고 세련된 곤조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은 모시치의 밑에서 수사를 돕지만 저마다 따로 생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토키치는 목욕탕에서 일하는 젊은이고 곤조는 술도매상에서 삼십 년 일해 대행수까지 지냈던 사내입니다.


이밖에도 의문의 무사 출신 노점 요리사와 건달 가쓰조도 간간히 등장해 흥미를 돋웁니다. 미미여사는 책날개에 있는 짧은 글에서 "에도 시대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이 매우 강했습니다. 제가 에도 시대를 계속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렇게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 때문입니다.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전합니다.


작은 마을을 커버하는 선량하고 고지식한 오캇피키에게 무슨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나겠습니까. 더구나 옛날이야기라 CSI 같은 과학수사도 없습니다. 누가 식중독으로 쓰러졌는데 그 동기가 수상하더라, 누가 가다랑어 한 마리를 천 냥에 사겠다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 등등 사소한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그런데도 읽다 보면 흥미가 생겨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 속으로 쭉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이게 바로 미야베 미유키라는 소설가의 공력이겠죠. 흔히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뒷맛이 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미미여사의 소설은 읽고 나면 마음이 짠하고 애틋해집니다. 그래서 더 권하고 싶은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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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너무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길래 회의실에 있는 책꽂이에서 아무 책이나 꺼냈습니다. 일과 상관 없는 책을 읽다보면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제 손에 잡힌 건 공지영 작가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라는 산문집이었습니다. 전에도 제목의 의미가 뭔지 궁금해서 한 번 들여다 봤던 책이었습니다. 


그런다가 '창을 내는 이유'라는 소제목이 붙은 챕터에서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한 줄에 나란히 놓인, 거의 똑같은 문장인데 어떤 건 띄어 쓰고 어떤 건 붙여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재미없고'는 붙이고 '의미 없고'는 띄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맞춤법검사기를 돌려봤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없다'는 형용사로 띄어 씀이 원칙이다. 그러나 어이없다, 쓸데없다, 아낌없다, 거리낌없다, 가량없다, 가없다, 다름없다, 느닷없다, 끊임없다, 틀림없다, 상관없다, 거침없다, 변함없다, 빠짐없다, 힘없다, 어림없다, 아랑곳없다는 붙여 쓴다


아, 정말 세상 사는 게 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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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의 역작 [쿨하게 생존하라]라는 책에서 제가 특히 좋아했던 부분은 ‘배드뉴스’에 대한 해석입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인생엔 굿뉴스와 배드뉴스가 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곡선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닥치는 굿뉴스와 배드뉴스. 우리는 그놈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요.


지금 저희 집사람에게 배드뉴스가 왔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길에서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뎠는데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그만 새끼발가락뼈가 부러진 것입니다. 다음 날 정형외과에 가서 응급처치로 반깁스를 했고 오는 화요일에는 다시 통깁스를 해야 합니다. 아내는 심란해 합니다. 발은 계속 부어오르고 제대로 걷지도, 씻지도 못합니다. 남편 밥을 차려주는 건 고사하고 당장 살림에 대한 이해력이 느려터진 남편에게 냉장고에 뭐가 어느 칸에 들어있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아프고 심신이 지칩니다. 그리고 당장 다음 주부터 회사생활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걱정이 태산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기회에 병가를 내고 한 달간 새로운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합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아내에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모양입니다. 당장 회사에서 한 달간 휴가를 내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설사 휴가를 낼 수 있다 해도 무급휴가를 쓰면 그만큼 비게 되는 생활비도 걱정입니다. 더구나 요즘 회사 내에서 기획 실적이 그리 좋지 않아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 혹시 잘리는 건 아닐까 하는 소심한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난감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번 ‘배드뉴스’를 더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사람 만나고 다니는 게 일인 아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실 수 없고 급기야 차를 마시러 나가기도 당장은 어렵습니다. 반면에 그만큼 자신만의 시간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당분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라고. 집에서 혼자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멍때리며 공상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밀린 드라마나 TV프로그램을  첫회부터 마스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집으로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입니다(어제만 해도 저희 집으로 두 분이 찾아오셔서 병문안 겸 업무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이유로 회사에서 잘린다고 하면 오히려 지금 잘리는 게 낫습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는 아내의 실력을 판단하기엔 좀 이르다는 생각이 첫 번째 이유이고, 또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지 않고 당장의 성과만으로 결정을 내리는 곳이라면 차라리 지금 관두는 게 낫다는 게 두 번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도대체 회사에선 아무런 소리도 안 했는데 우린 왜 이러는 걸까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무수한 ‘배드뉴스’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젊었을 때 정말 좋은 여자와도 어이없는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헤어져 봤고 회사도 열 번 가까이 그만둬 봤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특유의 뻔뻔함과 성실함으로 위기를 버텨왔습니다. 인복도 많았습니다. 정말 결정적일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나타나 저를 도와주었으니까요. 길은 있습니다. 대책이 안 설 때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낙관론을 불러오면 됩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절망적이거나 가시밭길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내도 저도 [쿨하게 생존하라]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혜자야, 걱정 하지 마. 일단 더 안 다치고 그만 하길 얼마나 다행이야. 그리고 이번 일 때문에 더 좋은 일이, 더 좋은 기회가 반드시 올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일단 좀 쉬어. 남들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정신 가다듬을 계기가 없다고 ‘차라리 감방에 들어앉아서라도 책을 읽고싶다’고 하는 마당에 이런 기회가 왔으니 오히려 얼마나 좋아. 남편이 좀 더 열심히 일할 테니 생활비 걱정 말고 정당하게 이 기간을 마음가는대로 잘 요리해 봐. 배드뉴스는 똑똑하고 긍정적인 태도 앞에서는 언제라도 굿뉴스로 변하는 거니까. 안 그래?"







https://www.youtube.com/watch?v=h3ETX6Pv2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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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92049365



칼럼을 쓴 조운찬 소장처럼 저도 이만수 감독의 독서목록에 감탄했지만 그보다 더 놀랐던 것은 명창 안숙선 선생이었습니다. 국악인이면 창 연습이나 하고 판소리 대사나 반복해서 외우겠지, 라는 저의 안일한 생각을 단숨에 깨부수는 깊이 있는 리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위고의 '장발장'(레 미제라블)과 고전 '춘향가', 그리고 한운사의 '대야망' 등에 대한 해석은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게 깊이 읽는 것이란 점을 깨닫게 해주는 분들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22242325&code=960205&s_code=ac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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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신경숙 표절 사건'에 관해 창비가 언론사에 보내왔다는 글의 전문을 읽었습니다. 


글은 어이없게도 신경숙이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미시마 유키오가 극우 인사이고 할복자살을 한 문제적 작가라는 점부터 거론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신경숙이 쓴  단편 <전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뛰어난 작품으로,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의 작가가 쓴 거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직핍한 현장감과 묘사가 뛰어나고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전쟁 중에서의 인간 존재의 의미, 인연과 관계의 유전 등을 솜씨있게 다룬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 - 


'사실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하기가 아주 어렵다. 유사한 점이라곤 신혼부부가 등장한다는 정도이다. 또한 선남선녀의 결혼과 신혼 때 벌어질 수 있는, 성애에 눈뜨는 장면 묘사는 일상적인 소재인데다가 작품 전체를 좌우할 독창적인 묘사도 아니다.(문장 자체나 앞뒤 맥락을 고려해 굳이 따진다면 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음악과 결부된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인용 장면들은 두 작품 공히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따라서 해당 장면의 몇몇 문장에서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를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표절시비에서 다투게 되는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을 가지고 따지더라고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다'


라는 황당한 단락입니다. 



표절을 한 것은 아니나 굳이 표절을 했다고 치고 따져보더라도 표절작이 원작보다 더 낫더라,라는 정말 어이 없는 자가당착을 드러냅니다(이거 쓴 사람 정말 창비 맞습니까). 그리고 표절 부분이 아주 지엽적인 내용들이라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표절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논리를 피력합니다. 마치 백만 원 있는 사람한테 만 원 꾼 다음에 너 돈 많으니 만 원 정도 없어도 살지? 그러니 난 만 원 안 꾼거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심뽀죠? 아, 어떡하나. 혹시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걸 아시면 화끈하게 해경 해체할 때처럼 당장 출판사 창비를 해체부터 하려 드실텐데. 어쩌려고 이러셨어요. 



그리고 신경숙 작가님.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당신을 찾는 전화벨이 끝없이 울릴 겁니다. 기차가 몇 시에 떠나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놓치지 말고 막차라도 타시기 바랍니다. 한국문학에서 당신이 있던 자리가 어디 풍금이 있던 자리에 비하겠습니까. 그리고 제발 잘 기억해 보십시오.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은 당신이 유일하게 읽었다던 그의 작품 <금각사>와 같은 책에 수록되어 있으니까요. 아무리 인터스텔라만큼 종횡무진 우주공간을 패럴렐로 엮어도 읽지 않고서는 그렇게 비슷하게 못씁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진짜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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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힘든 이유는 누구에게나 기쁜 날보다 힘든 날이 월등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퇴근 후에 허름한 술집에 모여 직장 상사를 욕한다. 아니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시댁 사람들 흉을 본다. 휴가를 가서 멋진 여행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단골 바에 가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유난히 기분 나쁘고 우울한 날엔 어떤 음악을 듣는 게 좋을까. 얼핏 신나는 음악을 듣고 마구 춤이라도 추면 나아질 것 같지만 심리학자들은 오히려 그럴 땐 슬픈 음악을 듣는 게 더 낫다고 조언한다. 신나는 리듬과 볼륨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자기기만’은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무엇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다음날 더 쓸쓸해지는 ‘파티 증후군’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가는 얘기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입시 준비나 직장 생활, 구직 생활 등등 무엇 하나 잘 풀리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시달리다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 한 번 하기로 한 사람들이라면 신나게 달리고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나 샤방샤방한 로맨틱 코미디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당의정에 싸인 예쁜 알약은 잠깐의 진통효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은 입에 쓰지만 약효가 서서히 퍼지는 보약처럼 우리 마음에 자양분이 되는 영화들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 개봉한 [산다]가 바로 그런 영화다.



강원도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는 주인공 정철은 매순간 벼랑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정도로 위기와 고통의 연속을 사는 인물이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대한민국 지방도시에서 정규 직장 없이 살고 있는 30대 남자. 부모는 산사태로 집이 무너질 때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셨고 옆에는 정신이 좀 온전치 못하고 행실도 헤픈 누나와 그녀가 낳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 조카, 그리고 착하긴 한데 약간 모자라 보이는 친구 명훈이 있을 뿐이다.


기댈 언덕 하나 없는 척박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밥을 벌기 위한 정철의 고군분투는 우직하고 눈물겹다. 첫장면에서 정철 혼자 가시덤불을 자르고 나무를 베는 장면이 한참 나온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다. 그저 계속 일을 할 뿐이다. 그 장면이 지나간 다음에도 왜 그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박정범 감독은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로케이션 헌팅을 하다가 그 장소를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그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이 첫 장면은 그 후로 계속되는 공사장, 벌목장, 메주공장(그리고 메주공장 사장집에서의 가사노동까지!) 등에서 펼쳐지는 고된 노동현장을 압축해서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박정범 감독은 놀라운 사람이다. 혼자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연기도 한다. 전작인 [무산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경우는 시나리오를 무려 50번이나 고쳤다고 하니 영화에 대한 그의 집념이 놀랍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여자 아이 이야기를 다뤘던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처럼 현실적인 주제의 이야기를 고안하고 그 위에 실제로 메주공장을 운영했던 자신의 가족사를 얹으니 영화가 씨줄날줄로 튼튼해질 수밖에 없다. 흔히 독립영화라고 하면 습작처럼 어둡고 거친 화면과 녹음, 허술한 내러티브 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선입견을 가볍게 배신한다. 물론 돈이 없어서 조명을 거의 쓰지 못한 듯한 촬영 상태는 좀 아쉽지만 능수능란한 화술과 시제를 적절히 뒤섞은 편집은 165분 동안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대사들도 훌륭하다.



정철은 자신과 동료들의 돈을 떼어먹고 서울로 도망간 공사장 십장의 집을 찾아간다. 밖에서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아이 혼자 라면을 끓여먹으려 하고 있던 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간 정철 일행은 그 집 현관 철문을 떼어들고 나온다. “현관문 다시 찾으려면 아빠한테 돈 들고 오라고 해.”라는 말을 어린 아이에게 남기고. 잔인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는 정철을 멋진 남자나 정의로운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뭐든 다 하는 무색무취한 사람으로 보여줄 뿐이다. 툭하면 가출을 하고 고속터미널에서 아무 남자나 끌고 가 섹스를 한 뒤 돌아와서는 자해를 하는 누나를 어쩔 것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빠를 찾고 싶다며 교회 헌금통에서 훔친 돈과 명훈이 알려준 쪽지만 들고 무작정 서울의 공장까지 올라간 조카 하나를 어쩔 것인가. 돈 떼어먹은 십장과 내통했다고 자신을 찾아와 린치를 가하는 동료들이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된장공장 기존 노동자들의 질시를 어쩔 것인가.



이런 이야기일수록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관건인데, 마침 이 영화는 정철을 연기하는 박정범은 물론 그의 바보 친구을 연기하는 박명훈의 연기도 믿음직하다. 연극판에서 이미 검증된 배우 이승연의 열연 또한 눈이 부시다. 나는 동생에게 붙잡혀 트럭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트럭문을 열고 그냥 도로로 굴러떨어지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마 정철의 누나가 대학로에서 오디션 보는 장면에서는 거의 모든 관객들이 전율을 느껐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연기가 처음이라는 하나 역의 신햇빛과 메주공장 사장딸 역의 박희본까지 모두 제 역할에 충실하고도 남는다. 다만 메주공장 사장의 연기만 조금 어색했는데, 알고보니 그 분은 감독의 친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종일관 무겁고 답답한 것만은 아니다. 간간히 유머코드도 있고(‘우리 같이 잤잖아’,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공장에서 함께 밥을 나눠먹는 메주공장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들도 눈물겹지만 트로트적인 감성이 깔려있다. 난 특히 뭐든 곁에서 도움이 되고싶다는 명훈에게 “그럼 수퍼에 들어가서 저 무우 하나 훔쳐봐”라고 말한 뒤 그렇게 못하겠다는 명훈에게 시범을 보이려 일부러 무우를 훔쳐나와 땅바닥에 패대기 치던 정철의 모습과, 술에 취해 버스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여자친구 진영을 찾아가 행패부리던 장면이 특히 좋았다. 해가 진 저녁, 터미널에 멈춰있는 고속버스 안에서 손님들과 함께 조하문의 ‘이밤을 다시 한 번’을 부르던 진영은 갑자기 버스 안으로 들어온 정철 때문에 당황한다. 그리고 곧 손님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정철. 취해서 저항도 제대로 못한다. 그리고 그런 정철을 감싸는 진영. 너무 가난하고 힘들면 사랑하기도 힘들다. 가슴 아픈 장면이지만 따스한 장면이기도 하다.



버스 안에서 주인공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정류장이 다가오자 좌석으로 허리를 낮추어 몸을 숨기던 [무산일기]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툭하면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절실한 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메주공장 사장이 “자네, 닭 잡을 수 있나?”라고 물었을 때 박정범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기시감처럼 튀어나와 나의 뇌리에 박혔다. 이것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당장 밥을 굶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들의 일자리라도 빼앗지 않으면 가족들을 건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답이 보이지 않는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비참한 이야기 속에서도 희망의 빛은 피어난다. 가출한 누나를 위해 조카 하나와 함께 집앞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장면이 그렇고 한밤중에 철문을 짊어지고 가서 다시 아이에게 현관문을 달아주는 정철의 전기드라이버 소리가 그렇다. 165분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던 영화였고 불이 켜지고 일어나면서 꼭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영화였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강추한다. 놓치지 마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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