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있.는.사.람.”
“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없어?”
“반창코 있는 사람!”
“반창고 내놔!”
까진 뒤꿈치에 붙일 반창고를 찾는 여주인공의 새된 목소리를 싣고 스테디캠이 좁은 분장실 복도를 이리저리 누비는 첫 장면부터, 난 이 영화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중국 6세대 감독 중 대표주자인 지아장커의 <세계>를 몇 주 전 EBS에서 프리미어로 방영했다. 하지만 이 날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야근을 심하게 해야 하는 상황. 바쁜 카피를 대강 엉터리로 정리한 후 한상이가 옆에서 썸네일 스케치를 하는 동안 나는 밤 11시부터 TV속 영화에 코를 박고 떨어질 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일은 일이다. 한상이는 넋을 잃고 있는 나를 TV에서 떼어놓았고, 우리는 일요일에 출근을 안 하기 위해 TV를 끈 뒤 기를 쓰고 새벽 한시 반까지 일을 해야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영화를 못 봐 너무 아쉬워하는 나를 한상이가 안타깝고 한심하게 쳐다본다.
일요일. 인터넷에 들어가보니 서울아트센터(구 허리우드극장)에서 <세계>를 상영 중이란다. 너무 반가워 망설일 틈도 없이 예매를 한 뒤 뿌듯한 마음으로 종로까지 달려간다.
‘하룻동안에 세계일주를!’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커다랗게 걸려있는 베이징의 세계공원. 타오와 타이쉥은 여기서 무용수와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둘은 연인 사이다. 에펠탑, 런던브릿지, 피사의 사탑 등이 삼분의 일 사이즈로 오밀조밀 흩어져 있는 이 거짓말 같은 공간에서 타오는 춤을 추고 타이쉥은 관광객들을 돌본다. 타이쉥의 사촌동생 얼샤오도 여기서 일하는데 그 놈은 영 적응을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동료들과 함께 화려한 무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타오는 늘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사실 안을 들여다보면 마음은 춥고 불안하다. 매일 쳇바퀴처럼 도는 공원 생활이 그렇고 아직 몸을 허락하지 않은 남자친구 타이쉥이 떠나갈까봐 안절부절 하기도 한다.
어느 날, 고향에서 잠깐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찾아왔을 때 셋은 같이 인사를 나누고 밥을 먹은 뒤 작별을 고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타오의 옛 남자친구를 배웅한 타이쉥은 그 날 둘이 함께 가곤 하던 초라한 여관에서 타오에게 사랑을 나누자고 조르다 또 거절당하자 ‘우리 애인 사이 맞아?’라며 화를 낸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여관이 너무 지저분해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알아, 우비를 입고 잤다고 했잖아.”
“내 아이디어, 좋지 않았어?”
측은한 마음에 더 이상 요구를 하지 못한 타이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타오를 말 없이 꼭 껴안아주는 것뿐이다.
잠깐 다녀 올 일이 있어 고향에 가게 된 타이쉥은 함께 길동무를 하게 된 유부녀 췬과 가까워진다. 췬은 노름과 여자 문제로 늘 사고를 치는 남동생에게 또 돈을 가져다 주기 위해 타이쉥과 함께 길을 떠난 것이다. 십 년이나 남편과 떨어져 사는 외로운 여자 췬은 어느덧 타이쉥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감정을 그대로 밀어붙인다. 세계공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애인 타오가 눈에 밟히는 타이쉥도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비밀스런 관계를 갖게 된다.
타이쉥이 없는 공원에서 일을 마치고 쓸쓸하게 걸어오던 타오는 동료 무용수 하나가 나이 든 공원 사장과 사진을 찍으며 데이트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두 사람은 절대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타오는 벤처사업으로 갑부가 된 젊은 남자에게 청혼을 받지만 거절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그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 안나를 만나게 된다. 함께 일할 땐 같은 무용수였지만 지금은 호스티스가 된 안나를 보고 타오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고향 친구와 후배를 베이징으로 잠깐 데려 온 타이쉥은 공원 여기저기를 안내하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다. 저건 런던브릿지, 저건 자유의 여신상, 저건 에펩탑이야. 모두 삼분의 일 사이즈로 제작됐지. 와, 에펠탑이랑 똑같이 생겼네. 진짜 에펠탑 가봤어? 아니… 고향 후배는 신이 나서 자기도 여기서 일할 수 없겠냐고 묻는다. 난감해진다. 어차피 가짜로 가득 찬 공원에서 혹시 자기 인생도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또 쓸쓸해진다.
공원 생활에 잘 어울리지 못하던 사촌동생이 결국 팀원들의 물건을 훔치다 걸려 쫒겨난다. 심란한 마음에 타오와 함께 자기 고향으로 내려간 타이쉥은 전에 친구와 놀러 왔던 고향 후배가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죽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가 죽기 직전에 유서로 내민 쪽지엔 누구누구에게 꾼 돈과 어느어느 가게에 진 외상값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산업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고향은 더 이상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흙먼지 섞인 바람이 황량하게 두 사람 사이를 훓고 지나간다.
어느 날 공원 사장이 회의를 소집해 모두를 불러모으더니 예전 팀장을 해임하고 젊은 여자 무용수를 팀장으로 임명한다고 전격 선언한다. 새 팀장은 예전에 타오가 사장과 데이트하는 현장을 목격했던 바로 그 친구다.
화려했던 불빛이 모두 꺼진 시간, 숙소로 돌아가다 그 친구와 마주친 타오는 팀장 된 걸 축하한다고 약간 비아냥거리지만 ‘그냥 직함만 달라진 것뿐인데 뭘.’ 이라고 하는 친구의 허탈한 대답에서 타인의 고단한 삶과 마주친 걸 깨닫고 당황한다.
여주인공을 연기한 자오타오는 실제로 세계공원에서 무용수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지아장커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탄 영화 <스틸라이프>에서도 주인공을 맡았다. 남자 주인공인 첸타이쉥도 베이징에서 연기과를 전공했지만 배우의 길이 막연해 ‘평생 불법DVD나 팔고 살아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인물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둘의 모습에서는 연기 이상의 깊이와 사실감이 절절이 묻어난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어요.”
남자친구의 의처증 때문에 맨날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또 다른 공원 커플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던 날, 피로연장에서 즐겁게 건배를 하던 타오는 우연히 췬이 파리로 떠나면서 타이쉥에게 보내온 문자메시지를 보게 된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잠자리까지 가진 타이쉥이 자신을 배신을 한 것이다.
숙소를 뛰쳐나온 타오는 돈을 아끼기 위해 값싼 여관으로 간다. 지저분한 여관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침대에 몸을 눕이는 타오. 우비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단추를 꼭꼭 여민 타오의 모습은 마치 누에고치 같다.
몇날 며칠 타오를 찾아 헤메던 타이쉥은 결국 신혼여행 떠난 동료의 빈 숙소에서 타오를 발견한다. 문을 열어주지 않고 바닥에 앉아 타이쉥에게 욕을 해대는 타오와 문 밖에서 용서를 구하는 타이쉥.
어느덧 날이 밝아 새벽이 되었고, 숙소에선 사람들의 요란한 비명과 고함이 다급한 발걸음과 뒤섞인다. 연탄 까스를 마신 사람이 있으니 빨리 119를 부르라는 소리와 함께 업혀 나온 남녀는 술을 마시고 잠들었던 타오와 타이쉥이다. 119는 아직 오지 않고 담요에 싸여 새벽 길바닥에 눕혀진 두 연인의 모습 위로 타오와 타이쉥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된다.
“타이쉥, 우리 죽은 거야?”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마지막 대사는 왠지 낯이 익다. 아,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리턴>에서도 맨 끝에 이런 대사가 나오지.(형, 우린 끝난 건가요?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한 영화 기자는 <세계>를 보고 나서 ‘어떤 감독은 삼십대 중반에도 거장이 된다’ 라고 했다. 귀엽고 경쾌했던 <키즈리턴>에 비해 <세계>는 훨씬 남루하고 고통스러운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좋다. 정말 가슴이 뻐근해진다. 2006.11.22 17:44
* 오늘 페이스북 댓글로 어떤 페친께서 지아장커의 <산하고인>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예전에 그의 영화 중 가장 좋아했던 <세계>의 영화일기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10년 전이군요. 다시 보고싶은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