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12117265&code=990303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반대말은 다품종 소량생산이 아니라 공유경제와 공유소비가 되었다는 글쓴이의 통찰, 경청할 만한 시론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해야 할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다만 집도 자동차도 책도 남의 것을 빌려 쓰거나 함께 쓰는 게 익숙치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다 따로따로 구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 칼럼을 읽으면서 공유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의외로 쉬운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나의 삶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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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시를 쓰기로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어느날 한 기자가 그의 어려운 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시 하나를 가리키며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시를 썼느냐고 묻자 ‘이 시를 쓸 때는 나와 신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로지 신만이 아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신도 무슨 뜻인지 까먹었다는 얘기다. 시계태엽오렌지라는 제목을 단 소설가 앤서니 버지스도 죽기 전까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시계태엽오렌지(A Clockwork Orange)는 대학 시절 '비짜 비디오'로 처름 본 이래 DVD로, 시네마테크에서, 그리고 또 얼마 전 '스탠리 큐브릭전'에서도 반복해서 보았던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 전편을 이토록 몰입된 환경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오늘 오후 2시, 전날의 격한 음주로 인한 숙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매를 강행한 나는 압구정CGC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와 정식으로 조우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져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버지스는 1972년 한 잡지와 인터뷰하며 “런던 동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괴상한’(as queer as a clockwork orange)이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밝혔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레이어 ‘orang’을 이용한 말장난이라고 말했다. 또 얼마 뒤 그는 이 제목이 “즙이 많고 달콤하며 향이 좋은 한 유기적 독립체가 기계장치로 바뀌는 것”에 대한 은유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언어유희에서 시작했든 은유효과를 노렸든 아무래도 버지스는 남들이 안 쓰는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는 데 매혹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서 새로운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기 싫어했던 스탠리 큐브릭도 당연히 이 단어의 특별함에 단박에 매혹된 것이리라. 

1972년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매우 연극적이고 감각적인 미장센을 고집하는 이 영화는 미술은 말 할 것도 없고 특히 음악의 배치와 쓰임새가 놀랍다.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세련된 중산층 작가의 부인을 강간하는 장면은 너무도 매혹적으로 그려져 영국에서 청소년들이 이를 그대로 따라한 모방범죄가 발생했을 정도라고 한다. 덕분에 이 영화는 감독이 사망할 때까지 영국에서는 더 이상 상영을 하지 못했고. 

틴토 브라스 감독의 지상 최대 포르노 <칼리큘라>에서 네로 역을 맡았을 때도 굉장했는데 말콤 맥도웰은 이 영화에서 완전 미친놈 그 자체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얼굴을 쇠막대로 내려칠 것만 같은 위악적이고 불안한 미소와 눈빛. 도대체 이십대에 이런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가 몇이나 있었던가.

그리고 얼마 전 스탠리 큐브릭전에 다녀온 뒤 남긴 짧은 포스팅에 내 친구 표문송 씨가 큐브릭 예술의 핵심은 음악!!이라는 댓글을 달았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폭력장면들에 우아하게 흐르는 클래식이라니. 그것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그런데도 마치 그 장면을 위해 작곡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신선함이라니. 완벽주의자이자 천재였던 스탠리 큐브릭의 공력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영화의 이미지와 테크닉에 압도당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새삼 거론하는 게 구차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재의 작품에 뭐 이런저런 토를 달겠는가. 그냥 감탄하다 잠드는 것도 행복한 리뷰의 한 가지 방법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고 인터넷에서 찾은 평론가 김효선의 글을 많이 참조해서 썼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3101&cid=42621&categoryId=4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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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회의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혼자 들어간 논현동의 식당엔 채널A가 틀어져 있었다. 북한 김치와 남한 김치를 비교하는 쇼프로였다. 붐비던 손님들이 한 차례 나간 뒤라 식당은 지나치게 한산했다. 마침 리모콘이 내 테이블에 놓여 있길래 나는 혹시 뉴스를 틀어도 되겠냐고 서빙하는 분께 양해를 구하고 재널을 YTN으로 바꿨다. 개성공단 중단에 관한 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식당 사장님께서 나이가 지긋한 남자 손님 두 분과 나누는 황당한 대화 때문이었다.


"거, 개성공단 창문마다 폭탄을 설치해서 나올 때 몽땅 폭파를 시켰어야 하는 건데. 그놈들 하나도 못 건지게. 아까워... 애초에 그거 지을 때 몰래 폭탄을 심어놓고 어제 같은 날 청와대에 앉아서 누루기만 하면 다 터지게! 어째 그 생각을 아무도 못했나..."


사장님과 손님 두 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셨다. 남한측에서 사업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관심 없고 오직 초가삼간 다 태우더라도 미운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너무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계셔서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건 맨날 내 입으로 지껄이는 공자님 같은 소리였지만 막상 같은 땅에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은 짐작보다 괴롭고 심란했다. 


문제는 이런 분들도 선거 때마다 우리와 똑같이 한 표씩을 행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분들의 선택은 우리의 짐작대로일 것이며, 그 신념은 앞으로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제도가 얼마나 심각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절망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더욱 더 이번 선거에 관심을 보이고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는 당장 떠오르지 않지만, 지금 야권을 생각하면 푹푹 한숨만 나오지만, 그래도 남은 희망의 불씨를 찾아보자. 누구 좋으라고 포기하나. 정신 차리고 투표 하자. 지난 대선에도 우리가 '설마' 하고 있는 동안에 이 분들이 그토록 카카오톡으로 서로의 투표를 독려하며 막판에 그녀에게 몰표를 몰아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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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PT 준비로 한참 바쁠 인터넷 서점을 통해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 샀다. 그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라고 쓰면 매우 폼나겠으나, 사실은 하권까지 읽다가 말았다). 바빠서 책을 읽다가 마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데 도중에 한 번 덮은 책은 다시 읽기가 참 힘들다. 그러면서 새 책에 대한 유혹은 끊임없이 들어온다. 사는 게 다 이렇다. 이 책도 사실은 여기저기서 워낙 제목을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읽어보리라 오래 전부터 다짐하고 있던 작품이었다. 


소설 시작 전에 작가가 25년만에 다시 쓴 서문이 나오는데 거기서 작가는 제목을 정할 때 ‘자정의 아이들(Children of Midnight)’은 너무 진부했고 ‘한밤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이 좋은 제목이었다,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글이 잘 써졌다고 고백한다. 나로서는 그 두 제목이 어떻게 진부하거나 그렇지 않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 책을 완독한 후에 이유를 찾아봐야겠다. 지금 현재 110페이지를 조금 넘게 읽었다. 권당 500페이지에 가까우니 이제 한 십분의 일을 읽은 셈이다. 


젊은 시절 런던의 ‘오길비 앤 매더’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적도 있는 살만 루시디는 매력적인 작가다. 이 책 역시 [무어의 마지막 한숨처럼]처럼 거침없고 끈적끈적 유연한 말과 글의 향연이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구비구비 펼쳐진다. 이야기의 시작은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는 날 자정에 태어난 살림 시나이라는 남자애부터다. 일단은 그 이유로 ‘한밤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소설의 화자인 살림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 그 옛날 독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인도로 돌아온 자신의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 때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어릴적부터 아담의 나이 많은 친구이자 수다장이인 뱃사공 타이를 등장시켜 시공간을 가르는 각종 ‘구라’들을 끝도 없이 펼치게 한다. 아담 할아버지가 구멍 뚫린 침대보를 사이에 두고 진찰(다 큰 여자가 남자에게 처녀가 함부로 몸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을 계속 하던 부잣집 처녀와 결혼하게 되는 얘기를 시작으로 영국의 식민과 독립을 향한 인도의 정치상황까지 별의 별 이전 얘기를 붙들고 국을 끓이고 있으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그의 아내 파드마가 와서 “이런 속도로 가다간 당신 탄생에 대해 얘기하기도 전에 이백 살이 돼버리겠어요.”라고 투덜대기까지 한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서 작자인 밀란 쿤데라가 나와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제목을 잘못 정했어. 사실은 이 책의 제목으로 썼어야 하는 건데.”라고 투덜대는 것만큼 재미있다. 



이 책을 사기 전에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이라는 노르웨이의 추리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작품인데 구성이 치밀하고 짧고 재빠른 대사들도 멋지다. 해리 홀레라는 연쇄살인 전문형사반장을 등장시켰는데 살인에 대한 묘사와 흥미로운 캐릭터 등등이 빛을 발하고 소설 곳곳에 영화나 음악에 대한 통찰력까지 번뜩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데니스 호퍼의 [뒤로가는 남과 여]라는 영화에 대해 언급할 때는 너무 반가워 혼자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요네스 뵈는 노르웨이의 국민작가이자 뮤지션이고 저널리스트이며 경제학자란다. 도대체 잘난 놈들이 너무 많아서 살 수가 없다. 어쨌든 구정 시즌을 이용해 이 책에 대한 리뷰도 좀 써봐야겠다. 그러나 일단 살만 루시디의 책이 먼저다. 술과 TV, 잠, 영화 등등 여기저기 ‘치즈 인 더 트랩’처럼 유혹이 널려있는 연휴다. 과연 나는 이 역경을 딛고 [한밤의 아이들]이란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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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별똥별을 

보면서 생각했다.


별은 아내를 주고 

똥은 내가 가져야지. 


그래도 별이 하나 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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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스타들이 출연하는 외국 라이선스의 대형 뮤지컬이 너무 거하거나 비싸다고(또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국내의 우수한 창작 뮤지컬을 권해주고 싶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진짜 당대 우리 모습를 담은 재미있는 이야기와 노래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창작 뮤지컬 [스페셜 딜리버리]를 관람했다. 왕년의 인기스타이지만 현재는 별 볼일 없는  행사가수로 전락한 정사랑과 가출 후 조건만남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열여덟 살 소녀 강하리가 우연히 병원에서 만나 서로의 영혼이 뒤바뀌는 얘기다. 영혼이 뒤바뀐다는 설정은 이젠 흔한 레파토리가 되었지만 입장이 뒤바뀜으로써 서로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라는 얼개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쓴 장유정 작가 덕분에 한국 창작 뮤지컬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오미영 작가를 만나고 나서 창작 뮤지컬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졌다고나 할까. 사실 나는 이 극을 쓰고 연출한 오미영 작가의 팬이다. 오 작가는 전작 [식구를 찾아서]에서도 그랬지만 언제나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쓰고 연출하는 작가다. 오늘 본 작품에도 나오는 대사 결국엔 해피엔딩’처럼 그녀는 늘 어렵고 소박하지만 사람이 살아갈 만한 세상을 구한다.


오늘 첫 공연이라 그런지 조금 합이 안 맞는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작들에서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었던 배우들이라 곧 기가 막힌 호흡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단 일곱 명이 쉬지 않고 백 분 내내 스물두 곡의 노래와 춤을 선보인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대본 공모를 통해 2015년 창작뮤지컬 우수작품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라 한다. 2월 14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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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파리 지하철공사가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된 시란다. 짧은 단상이지만 그 상징성과 압축미가 너무 뛰어나 이 시를 소재로 쓴 이문재의 칼럼이 사족처럼 느껴진다. 시민 공모작인데도 수준이 이 정도라니, 어렸을 때부터 철학과 문학을 제대로 배우는 나라의 전통이 부러울 뿐이다. 우리나라 지하철에 걸려있는 어이없는 시민 공모작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29211319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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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화를 처음 봤던 건 [원더플 라이프]라는 작품이었다. 꽤 오래 전 광화문에 있는 극장에 예약을 했는데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혼자 전철역에서부터 미친듯이 달려 영화 시작 직전에 겨우 입장을 했고 뛰어오느라 너무 숨이 차서 몇 분간 민망할 정도로 숨을 헐떡거리며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림프계에 머물면서 일 주일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작은 단편 영화를 한 편씩 찍은 다음에 비로소 다음 세상으로 간다는 내용이 참 우화적이면서도 통찰력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을 묻는 질문에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서 놀았던 기억’을 대는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 서글퍼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씨네21’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를 정말 인상 깊게 보았고 [걸어도 걸어도]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다. 게으른 탓에 데뷰작 [환상의 빛]이나 오다기리 조가 나오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오늘 본 [바닷마을 다이어리] 역시 좋았다. 정말 악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인데도 이렇게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저력은 아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번 작품은 어렸을 때 가족을 버리고 다른 가정을 꾸몄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는 시건을 계기로 배다른 여동생과 살게 되는 세 자매의 이야기인데,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스토리텔링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과 아이들, 노인들 각각의 심리를 묘사하는 상황설정과 대사의 섬세함은 정말 최고다. 내친 김에 영화의 내용을 자세하게 쓰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아무리 그 내용을 상세히 전달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아야세 하루카는 예전엔 그저 예쁘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젠 공력이 쌓여서 그 어려운 맏언니 역할도 참 똑부러지게 잘 하는구나 하는 생각, 가세 료가 어느새 저렇게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 릴리 프랭키는 정말 멋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앞으로도 무조건 봐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 등을 짧게 메모해 놓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아내는 ‘릴리 프랭키 아저씨는 우리나라 김창완과 참 비슷하다’는 얘기를 했다. 맞는 얘기다. 소설도 쓰고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도 하는 릴리 프랭키는 여러 가지로 김창완과 많이 닮았다. 특히 둘 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유스러운 일상과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렇다. 


일상이 바쁘고 단조로워서 밀린 영화들이 많다. 개봉한 지 꽤 지난 타란티노의 영화도 봐야 하는데. 어쨌든 오늘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한 편 보았으니 이 또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일은 월요일. 또 다시 일상과의 전쟁이다. 뭐 어쩌겠는가. 오늘 본 영화의 좋은 에너지를  연료 삼아 내일 하루를 또 무사히 잘 버텨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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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집에서 쉬면서 느긋하게 TV를 보거나 멍때리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만의 은밀한 기쁨이다. 게으르게 일어난 우리는 오랜만에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게으른 오전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침대에 누워 <TV동물농장>을 보는 동안 나는 거실에서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장강명의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조금 더 읽었고 11시가 넘어 브런치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버스를 타고 성동구민체육센터 맞은편에 있는 비사벌콩나물국밥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방금 밥을 먹고 왔지만 이상하게 또 배가 고프네...나는 식충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커피를 내리고 방금 사 온 식빵을 가져오길래 또 마주 앉아서 따뜻한 빵을 뜯어먹었다. 마침 tvN에서 <치즈 인 더 트랩> 1.2회를 연속으로 틀어주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해서 TV속으로 빠져들었다. 워낙 tvN에서 자체 홍보를 많이 해서 ‘도대체 뭐길래 저래?’라는 마음도 있었고 또 영화 <은교>에서 너무나 매력적이었던(홍보 포인트를 엉뚱하게 잡아서 그렇지 영화 자체도 홀륭했다) 김고은의 연기가 정말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2회를 지켜보니 일단 박해진, 김고은의 매력이 대단했고 서강준, 이성경 등 조연들의 역할도 젊은 시청자들의 입맛에 딱 맞을 것 같았다. 잠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이제 겨우 2회 방송을 했을 뿐인데 케이블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원작 웹툰의 인기가 워낙 높아서 부담도 엄청났을 텐데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선 주연배우들의 연기. 별로 예쁘지 않은 배우 김고은은 오히려 그래서 전형적인 연기를 벗어나 자신만의 아우라를 가지는 것 같다. 복학생 선배 역할을 하기엔 좀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박해진도 특유의 카리스마로 극의 흐름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다. 그리고 <커피프린스 1호점>을 연출했던 이윤정PD의 공력이 있다. ‘로맨스 +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웹툰을 원작으로 했기 때문에 자칫 드라마 전개에 비약이 심할 수 있다. 그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은 연기자들의 노력도 있지만 플롯의 헛점을 탄탄하게 해주는 극본과 연출의 힘이 절대적이다. 호조의 출발을 보였다는 것은 이들이 젊은 연기자들의 힘만 믿지 않고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러가지 미덕들을 여기저기 잘 숨겨 놓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으면 아마 중국이나 동남아에선 더 난리가 날 것이다. 새로운 스타 탄생이요 한류 콘텐츠의 새로운 방향 제시일 수도 있다. 그냥 예쁘기만 한 드라마가 아니라 볼 때마다 다음 회가 기대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그 덫에 놓인 치즈'를 덥썩 물 수 있도록 계속 성실하게 끌고 가줬으면 하는 게 평범한 시청자로서의 바람이다. 이제 네 시부터는 <응답하라 1988> 재방송을 봐야겠다. 게으른 일요일, 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맛있게 먹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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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 박연준과 시인이자 인문학 저술가인  장석주는 이십오 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커플이다.  따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그냥 동거에 들어갔던 이 커플이 며칠 전인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결혼기념일로 정하고 결혼 서약 대신 냈다는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었다.


이 책은 작년에 호주 시드니에 사는 지인이 한 달 간 집을 비우게 되었으니 두 시람에게 와서 살아보라고 했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집이 한 달간 비니 그동안 와서 우리가 쓰던 집과 방과 이불과 숟가락 젓가락을 마음대로 써도 무방하다고 한 사람도 대단하지만, 지인이 살러 오랬다고 냅다 서교동 집을 한 달이나 비우고 날아갈 수 있는 두 남녀도 대단히 부러운 인생이다. 그리고 이걸 책으로 엮어 결혼 서약 대신 내게 한 기획자이자 시인인 김민정 역시 멋진 사람이다.


제목인 '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라는 문장은 박연준이 쓴 앞부분의 챕터 ‘첫날’이라는 글 속에 들어 있다. 이 책은 반쯤 나눠서 앞 부분은 박연준이 쓰고 뒷부분은 장석주가 쓰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이지만 평이하고 살뜰한 문장을 구사하는 박연준의 글이 미셀러니에 가깝다면 보다 개념적이고 인문학적인 글쓰기를 지향하는 장석주의 글은 에세이스럽다. 



나는 두 주인공이 시드니에서 마주친 월요일의 운동장 모습에서 눈이 멈췄다. 장 본 물건들을 들고 걸어오던 두 사람은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 벤치에 짐을 부리고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운동장엔 한 남자가 부메랑을 던지며 놀고 있었고 그 옆엔 여자 아이가 혼자서 농구공을 튕기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 부메랑을 던지며 놀던 남자는 타인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의심 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월요일인데 저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것일까?’ 라고 놀라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오히려 바쁘게 살아야만 정당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표상이기도 하다. 


애초에 장석주는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지 잠 깨고, 혼자 걸어다니는 '1인분의 고독'에 피가 길들여 있던  사람이었는데, 박연준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삶에 들어옴으로써 ‘2인분의 고독’을 덥썩 받아 품기로 한 사람이라 고백한다.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사는 과정을 '고독이라는 공통분모로 묶다니, 이는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더 게으르고 더 형이상학적인 취향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사람조차도 시드니 교외 주택에서 보낸 한 달의 시간은 '심심함을 품은 시간들'이라며 그 소중함을 다시 반추하고 있다. 요즘 세상에 심심함을 품은 시간들이라니. 베란다에 의자를 내놓고 햇볕을 쬐고 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보낸 시간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바로 이 장면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결혼서약을 대신하는 의미로 두 남녀가 쓴 에세이라는 멋진 포장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한 달 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햇볕을 쬐고 포도주를 마시며 논 이야기다. 심심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뒤쳐짐에 대한 염려나 늙음에 대한 안달도 내려놓은 채 진짜 ‘심심하게’ 지낸 부러운 시간의 기록들. 에필로그에서 장석주는 그가 누렸던 심심함을 이렇게 찬양한다.


심심한 시간은 그냥 심심하기만 한 게 아니다. 심심함 속에서 잊었던 것들이 되살아나고, 사라진 것들이 부활한다. 심심한 시간들은 죽은 것들을 되살리고, 잃었던 것들을 다시 돌려주며 감미로운 감각들을 맛보도록 했다. 시드니의 유칼리투스 숲과 공원들, 푸르름에 물든 하늘과 바다, 청명한 날씨들, 롱블랙 커피, 달링 하버를 걷던 시간들, 우리를 환대했던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자.



나는 겨울이면 가끔 눈 쌓인 산장에 갖혀 지내는 상상을 한다.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에 나오는 그런 산장처럼 아무도 오지 못하는 그 곳. 거기서 무얼 할까. 핸드폰도 TV도 단절이다. 오늘 내일이 지나야 사람들이 쌓힌 눈을 뚫고 나타날 것이다. 긴긴 겨울밤. 밖엔 옅은 눈보라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벽난로 안의 장작불은 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다...아, 회의를 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여기는 회사. 화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다 자리에 앉아 회의를 준비하거나 일을 하고 있다. 논현동에 눈내리는 산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제기랄.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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